[범대순의 세상보기] 낙엽을 쓸면서 생각난 오상순 시인

뜰에 낙엽을 쓸면서 오상순 시인 생각이 났다. 1950년데 휴전이 되면서 전쟁보다 더 지치고 가난한 우리들은 무엇인가 막연한 희망을 가지고 대학으로 돌아갔다. 그때 명동은 폐허의 상징적 거리였다. 외롭고 슬프고 절망의 거리를 우리는 까닭도 없이 헤매다가 다방에 들리곤 했는데 거기엔 언제나 시인 오상순이 앉아 있었다. 담배 연기가 가득한 그의 주위에는 젊은 문학청년들이 모여 있었다. 오상순 시인은 가족이 없이 혼자 산다고 들었다. 그에게는 다만 다방과 담배와 조용한 분위기뿐이었다.
어느날 석양 다시 명동을 걷다가 ‘문학의 밤’이라는 포스터를 보았다. 그리고 그 다방에 들렸더니 마침 지명을 받고 오상순 선생이 일어서는 자리였다. 사회자가 마이크를 전하자 그는 그것을 물리치면서 “나는 문명의 이기를 거부한다” 고 말하였다. 그분은 유달리 목소리가 작았다. 그래서 앞줄 몇 사람 말고는 아무도 그분의 말소리를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불평하지 않았다. 그리고 눈을 통하여 조용히 그의 말소리를 경청하였다. 모두 다 숙연하게 공감하는 분위기였다.
전쟁을 겪고 났으니 우리는 문명의 이기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었다. 효율적인 문명의 이기일수록 효율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도구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었다. 오상순 시인의 말속에 그 뜻이 있었고 그분의 작은 목소리를 눈으로 듣는 그 분위기 속에 그 공감이 있었다. 북진 통일이 강력하고 무서운 사회적 이슈였기 때문에 아무도 전쟁을 저주할 수 없는 시대였다. 만일 전쟁을 저주하거나 반전의 언동은 곧 이적의 혐의를 받는 시대였다.
나는 오상순 시인에게 인사를 드릴 기회도 없었고 그 뒤로 먼빛으로도 그를 본적이 없다. 나의 생활은 명동을 들려 낭만을 즐길 처지가 아니었다. 우연한 계기에 소설을 쓰는 같은 과 학생의 집을 들리게 되었는데 그는 그의 어머니에게 나를 고학하는 학생이라고 소개하였다. 아마 그에게는 그렇게 보인 모양이지만 특별히 고학하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생활이 어려운 것은 사실이었다. 그런 나의 마음속에 오상순 시인의 낭만이 들어 설 곳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 뒤로 오상순 선생은 오랫동안 나의 잠재의식 속에 숨어 버렸다.
그 오상순 선생이 뜻하지 않게 낙엽을 쓸면서 다시 살아났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낙엽을 쓸어 자루에 담으면서 생각이 난 것이다. 그 자루에 낙엽과 같이 다른 쓰레기를 담으면서 살아난 것이다. 그 쓰레기 속에 요금 별납 우편물들이 들어있다. 그것도 하나 둘이 아니다. 그 속에는 각종 통지서 고지서와 각종 유인물이 들어 있다. 그리고 분명 수신자가 나의 이름이지만 나는 분명 그 수신을 거부한 것들이다.
문학 하는 사람들이 모인 어떤 자리에서 ‘나는 요금 별납 우편물을 거부한다’ 라고 말한 적이 있다. 책을 내본 사람은 책을 내는 일 못지않게 친지에게 그 책을 부치는 일이 힘든다. 나로서는 책을 내는 일이 한달이 걸리고 그 책을 부치는 일에는 두 달이 걸리는 수도 있다. 편하기로야 요금 별납 편의가 좋다. 그러나 그 책을 받는 입장은 다르다. 책을 받는 입장은 직접 찾아와 받는 것이 제일 좋고 그 다음은 손수 우표를 붙여 보내 온 책이 더 정답다. 요금 별납 우편물로 오는 책은 어딘지 도매금으로 취급받는다는 인상을 받는다.
’나는 요금별납 우편물을 거부한다‘는 오상순 선생의 ’나는 문명의 이기를 거부한다‘를 연상시킨다. 아마 나의 무의식 속에 그 말이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생각해 보면 문명의 이기나 요금별납 우편물이나 쓰레기라는 점에서 다를 바가 없다. 한국전쟁이 오상순 선생의 쓰레기이었듯 요금별납 우편물이 상징하는 오늘의 잡다한 생활은 나의 쓰레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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