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수 씨 통해 듣는 송암동 민간인학살 전말

드르륵 드르륵…“꿈에서도 잊혀지지 않는 공포”
시민군 오인해 계엄군 간 교전…민간인 상대 분풀이 사격
주민·시민군 등 8명 사망…상점 약탈·전선 절단 등 자행
시신 행방 오리무중…“진상규명위 발족·제대로 조사해야”
 

송암동 양민학살 요도 /최진수씨 제공

“드르륵 드르륵…탕탕” 1980년 5·18 당시 시민군이었던 최진수씨는 당시 급박했던 상황을 꿈에서조차 잊을 수 없다.

80년 5월 24일 오전 10시께 시민군의 거점인 도청 상황실에는 제보 하나가 들어왔다. 광주 남구 효덕초등학교 인근에서 총 소리가 들리고 상당수 군인들이 있다는 소식이었다.

최 씨를 포함해 순찰에 나서기로 한 시민군 10여명은 전남도청을 출발해 트럭을 타고 송암동 부근 효천역 방면으로 향했다.

이날 오후 1시 20분께 광주에서 목포 쪽으로 가는 길목인 효천초등학교 인근에 다다른 시민군은 길가에 있는 민가 앞에 나와 있는 주민에게 “신고 받고 왔다. 군인들이 어디 있냐”고 물었다.

그 때였다. 맞은 편 도로가에 위치한 가게 아주머니가 시민군 뒤통수를 향해 “군인이다”고 소리쳤다. 뒤를 돌아보니 APC장갑차 한 대가 효덕초등학교 골목길에서 나주 방면으로 좌회전하려고 방향을 틀고 있었다. 최 씨와 APC장갑차에 탄 11공수여단부대 선두병력인 63대대 소속 기관총 사수와 눈이 마주쳤다.

시민군을 발견한 공수부대는 기관총 캘리버 50을 무차별 사격했고 시민군들은 잽싸게 민간 재래식 화장실 안이나 민가로 숨어들었다. 이 중 최씨와 김군을 포함한 시민군 4명은 포복해 2차선 도로 건너편 서너채 민가 중 이백윤 씨의 집으로 향했다.

뒤따라오던 11공수여단 부대가 주변에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이 와중에 계엄군 간 오인사격이 벌어졌다. 이날 오후 1시55분께 광주~나주로 이어지는 1번 국도를 차단하고 인근 야산에 매복 중이던 전투병과교육사령부(전교사) 보병학교 교도대 병력이 11공수여단 병력을 시민군으로 오인해 장갑차와 트럭에 90㎜ 무반동총 4발을 명중시킨 뒤 집중사격을 했다. 11공수여단도 즉각 응사했다. 이른바 군부대 간 오인교전으로 제63대대 병력 9명이 사망하고 33명이 부상을 입었다. 40여분 간 엄청난 화력을 쏟아부은 끝에 11공수여단이 전교사 교도대 병력을 진압하면서 사격은 비로소 멈췄다.

11공수여단 부대원들 50여명은 시민군이 피신한 이백윤 씨 집에 무차별 사격을 가하며 에워쌌다.

당시 이 씨와 이 씨의 친구, 며느리, 하숙을 하는 고등학생과 초등학생 10여명 등 민간인이 집 안에 있었다. 이 씨는 저항하려는 시민군에게 “이 곳에서 총을 쏘면 이 집에 있는 어린아이 등 모든 사람들이 몰살당한다”며 사격을 말렸다.

집 안에 있던 시민군 3명과 화장실에 숨어든 시민군 1명은 민간인을 살리기 위해 투항을 결심했고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린 채 가장 먼저 툇마루에서 발을 뗀 채 집 마당 앞으로 나온 김군은 하사 계급장을 달고 있는 11공수대원이 관자놀이에 총을 쏴 즉사했다.

11공수여단은 두번째로 나간 최 씨의 관자놀이에도 총구를 겨눴다. 그때 대위 계급장을 단 장교가 “집 안에서 죽이면 시끄러우니 길로 끌고 나가라”고 명령해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최 씨는 상무대 영창에 끌려 갔다가 그해 7월께 광주교도소 이감되는 등 고초를 겪었다.

당시 11공수여단은 김군의 주검을 그대로 방치하고 철수했다. 인근 마을 사람들이 그 주검을 금당산에 가매장했다. 최씨는 그해 7월 1일 광주교도소 이감 전 담당 수사관과 현장검증을 나갔다가 주민들로부터 5월31일 공수부대원들이 주검을 수습해 갔다는 말만 전해 들었다고 한다.

이날 오인사격으로 전력 손실을 입은 11공수여단은 대대적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다. 11공수대원에게 손을 흔들던 초등학교 4학년 전재수(당시 10세) 어린이와 저수지에서 목욕을 하던 전남중 1학년 방광범(당시 13세) 학생이 사살당했다. 막내아들을 찾으러 왔다가 총소리에 놀라 하수구에 대피한 박연옥(당시 49세) 씨는 총격을 받아 사망했다. 아무런 이유 없이 집 안에 있다 끌려나와 즉결처분 당한 주민도 있었다. 이날 마을주민과 김군 등 8명이 죽었고 마을주민 노득규씨를 포함한 7명이 중상을 입었다.

대대적 약탈과 가택을 향한 무차별 사격도 이뤄졌다. 가옥들을 향해 총을 난사하는 등 11공수여단의 분풀이가 시작됐고 인근 상점들을 닥치는 대로 약탈했다. 또 송암동 주변 마을 일대 전선과 전화선, 변압기를 절단·폭파시켰다. 총격으로 마을 주민 김행남 씨 소유 가축인 칠면조 250여마리가 떼죽음을 당했다. 전재산인 임신한 젖소 두 마리가 죽자 주인이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난 일도 있었다.

민간학살 과정에서 송암동 금당산 아래 분뇨통에 쌓아뒀던 주검들의 행방도 오리무중이다. 송암동에서 식당을 했던 김모(당시 59세)씨는 1995년 12월 검찰 조사에서 주검 9구를 분뇨통에서 목격했다고 진술한 바 있다.

송암동 민간인 학살 사건은 39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제대로 된 조사 한 번 이뤄지지 않은 상태다.

내년 5·18 40주기를 앞두고 최근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 출범을 담은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일부개정법률안’이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를 통과한 만큼 민간인 학살 사건과 시신 암매장 여부 등에 대한 진상규명이 절실한 시점이다.

최진수 씨는 “이제라도 사건의 진실을 밝혀내고 시민군들의 시신을 찾아줘야 한다”며 “11공수여단 63대대에 복무했던 당시 부대원들을 수소문하면 시신의 행방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고 밝혔다.
/정세영 기자 jsy@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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