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 엑스포 유치 13주년 기획] ① 주역들을 기억하다.

13년 전인 2007년 11월 27일 여수 엑스포 유치
정부, 엑스포 준비위해 여수에 12조 원 쏟아부어
정몽구 회장 등 유치 주역들에 대한 기념사업 전무

 

여수엑스포 명예 유치위원장인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이 지난 2007년 9월 세계박람회기구(BIE) 로세르탈레스 사무총장을 만나 여수 유치를 당부하고 있다./남도일보 DB

우리는 의식 속에 간직해온 어떤 인상이나 경험을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흐르면서 망각하고 산다. 뇌리에서 편린처럼 무수히 흩어진 것들을 다시 불러 모으고 생각해 낸 것을 기억이라고 한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들이 있다. 그래서 과거를 통해 교훈을 얻는다. 과거를 바로 알지 못하면 미래가 없다고도 한다.

10년 전 20년 전 여수를 기억하고 있다가 여수에 가본 사람들은 전혀 다른 세상의 여수를 경험하게 된다. 그 변화의 중심에는 여수엑스포가 있다. 내일(27일)이 바로 여수엑스포 유치 13년째 되는 날이다. 남도일보는 여수엑스포 유치 13주년을 맞아 정몽구 회장을 비롯한 당시 주역들을 재조명하는 기획 시리즈를 마련했다. 기획물을 통해 시민적 공감대를 만들어갈 계획이다.

여수 엑스포 유치는 발제에서 도전의 실패와 성공, 그리고 개최까지 15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세월 동안 김영삼부터,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에 이르기까지 4명의 대통령을 거쳤다.

정부는 엑스포 유치 이후 개최 때까지 여수에 12조 원을 투자했다. 엑스포의 성공개최를 위해 새로운 도로를 만들고 KTX를 개통하고 엑스포 행사관을 짓고 호텔을 짓고 아름다운 경관 조성에 온 힘을 쏟아부었다.

그 무렵 버스커버스커의 데뷔곡 ‘여수 밤바다’가 음반에 올려졌다. 언제부터인가 여수 하면 떠오른 단어는 ‘여수엑스포’ 거나 ‘여수 밤바다’다. 물론 오동도, 향일암, 돌산대교, 돌산 갓김치도 있다.

남녘의 작은 항구도시 여수는 최근 10년 사이 엑스포 개최와 노래 여수 밤바다를 통해 재탄생했다. ‘여수 밤바다 이 조명에 담긴 아름다운 얘기가 있어 네게 들려주고파’로 시작되는 한 곡의 노래로 여수는 대한민국 밤바다를 대표하게 되었다.

버스커버스커가 정식 가수로 데뷔하던 시기는 2012년 3월 하순이었고 여수 엑스포는 그해 5월 12일 개막 93일간의 대장정을 시작했으니 거의 같은 시기에 국민적 사랑과 관심을 받게 된 것이다.
 

여수 밤바다 야경/여수시 제공

한마디로 여수가 떴다. 개벽한 것이다. 오늘의 여수는 엑스포 유치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엑스포 유치의 주역들을 조명하기 위해 여러 명과 가진 인터뷰에서 그들은 한결같이 “여수 발전이 20년에서 30년은 앞당겨 졌다”며 “그 원동력은 엑스포 유치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엑스포 유치의 공로자지만 특히 유치위 명예 위원장이었던 정몽구 현대차 회장”이라며 한목소리를 냈다. 정 회장은 1999년 첫 도전 때 유치위원장을 맡아 2010년 유치에 실패한 이후 2007년 재도전 유치 성공 때까지 함께 했다.

물론 최대 공로자는 여수시민이다. 정부에서는 당시 노무현 대통령을 비롯해 총리와 관계 장관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재계에서는 김재철 유치위원장, 허동수 GS칼텍스 회장,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등이 있다. 그럼에도 정몽구 회장을 가장 상징적인 인물로 꼽았다. 정 회장은 2012여수엑스포 개최를 지원한 공로로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그는 두 번째 도전에 나선 2007년 4월에도 그룹 내에 세계박람회 유치지원 태스크포스팀을 구성한 이래 지구 세 바퀴에 해당하는 12만6천㎞를 돌며 세계 정부 인사 150여 명을 만나 여수 유치 당위성을 알리는 민간 외교에 나선 공을 인정받은 것이다.
 

2000년 2월 2010여수세계박람회 유치위원회 출범 현판식/남도일보 DB

여수는 1998년부터 박람회 유치를 준비해 왔었다. 2001년 5월 등록박람회 개최 신청서를 국제박람회기구(BIE)에 제출하고 2002년 12월 등록박람회인 ‘2010 세계박람회’ 유치전에 도전했다. 그러나 중국 상하이와 4차 투표까지 가는 접전 끝에 분루를 삼켰고 절치부심한 여수는 2007년 11월 27일 개최지로 확정되는 낭보를 듣게 된다. 여수 엑스포에는 미국과 중국 일본 등 전 세계 104개국과 UN 등 10개의 국제기구가 참가했다.한국의 나폴리 미항 여수가 전한 엑스포는 바다를 통해 ‘인류가 직면한 공동과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 가자’는 정신으로 승화돼 세계사와 지구촌에 기록될 것이다.
 

여수세계박람회장 전경/여수시 제공

남도일보가 정 회장에게 주목하는 것은 그가 성공한 엑스포뿐만 아니라 15년간의 도전과 실패, 재도전과 유치 성공까지 한 편의 드라마 같은 여수 엑스포의 주역이었고 후견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엑스포 유치 13년, 개최 8년이 지나면서 시민들의 기억 속에서 점차 잊혀져 간다는 사실이다. 관심을 가져야 할 지방자치단체도 시장이 계속 바뀌면서 너무 소홀했던 것은 아닌지 반문해 볼 일이다. 며칠 전 취재차 다녀온 여수 엑스포 기념관에는 그 어디에도 당시 주역들에 대한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정몽구 회장이 사재를 털어 오동도에 지은 조그만 기념관에 김대중, 노무현, 반기문 등과 함께 모니터 속에 디지털 사진으로 남아 있었다. 유치전 당시 상근 부위원장을 맡았던 정찬용 노무현 청와대 전 인사수석은 “흉상이라도 세워 드리는것이 인간의 도리다”고 했다. 30여 년 동안 전남도의원, 여수시장, 국회의원 등을 지내다 자연인으로 돌아온 여수의 산증인 주승용 전 국회부의장도 “부끄럽다. 흉상이라도 세워드려야 한다”고 같은 의견을 피력했다. 명징하게 다가온 것은 우리가 여수 엑스포의 주역들을 위해, 특히 정몽구 회장에 대한 감사의 징표를 남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동부취재본부/박준일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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