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성화 청소년활동가의 남도일보 독자권익위원 칼럼

“당신은 천사와 마주한 적이 있나요?”

임성화(청소년활동가·사회적협동조합 살림 팀장)

웃음을 잃어버린 아이와 이젠 더 이상 웃을 수 없는 아이.

수일 전 <그것이 알고싶다> 방송 프로그램에서 만난 정인이, 천사의 얼굴을 우리가 마주하게 된다면, 딱 이 모습이었을 것만 같다. ‘해맑게 웃고 있는 정인이의 그 눈웃음’, 방송은 끝났지만, 정인이의 그 눈웃음이 좀처럼 떠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더 선명하고, 더 강렬히 남아 마치 내 옆에 여전히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쩌면 필자만의 오묘한 감정은 아닐 것 같다.

예쁜 눈웃음을 가졌던 정인이는 8일만에 입양기관에 맡겨졌고 위탁가정에서 자랐다. 약 두 달 후 입양처가 결정되었고, 또 수개월의 시간이 지난 후, 양부모에게 입양이 이루어졌다.

따뜻하고 행복한 보금자리를 꿈꾸며 떠났을 정인이는 9개월도 채 되지 않아 더 이상 웃을 수 없는 싸늘한 죽음으로 우리 앞에 서있다. ‘아직 살만하고, 아직 따뜻한’ 세상이 무엇이고 어떤 느낌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던, 9개월이 마치 9년 같았을 ‘고통스럽고 차디찬 세상’을 그렇게 견뎌내고 그녀는 서럽게 떠났다.

몇 번의 살려낼 기회가 있었지만, 골든타임을 놓쳤다. 거짓말로 그럴 듯 잘 포장하면, 살려내지 못하고, 구해내지 못한 제도와 시스템 문제는 어제 오늘만의 문제가 아니다. 3번의 학대신고에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던 무책임한 경찰, 매뉴얼이란 틀에 갇혀 더 적극적으로 살피지 못했던 아동보호전문기관, 현장과 괴리감있는 ‘아동학대법’과 그간 아동 학대에 관대해왔던 처벌 선례들. ‘설마 어떻게 되겠어?’, ‘매뉴얼에 없는데’, ‘남의 일에 괜히’, ‘이정도 까지만’, 따지고 보면 방기하고 그냥 내버려두었던 나를 포함한 어쩌면 우리 사회의 총체적인 ‘미필적 고의’는 아닐는지. 우리는 과연 정인이의 죽음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

양부모의 살인, 아동학대치사, 아동유기, 방임 등 혐의 관련 검찰이 기소한 공소장을 보면 이들은 수차례에 걸쳐 정인 양을 학대, 방치한 것으로 확인된다.

또 검찰은 양모가 정인 양을 수차례 학대 폭행한 사유로 양육 스트레스를 꼽았다. 정인 양이 울고 보채거나 밥을 잘 먹지 않는다는 이유로 양모가 “양육 스트레스를 받았고 정도 생기지 않는다”고 진술했기 때문이다. 검찰 역시 공소장에서 “양모가 집에서 양육을 하면서 피해자를 향한 짜증, 분노가 커져만 가 점점 피해자를 심하게 폭행하는 등 학대하게 됐다고 말한다.

흔히 ‘아동학대’를 성인이 아동의 건강 또는 복지를 해치거나 보호자가 아동을 유기하거나 방임하는 것이라 말한다. 문제는 이러한 아동학대를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이 여전히 가정에서 학대 받는 아동들에 대해서는 ‘부모의 훈육이나 체벌’로 생각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또한 ‘정인이 사건’처럼 단순한 체벌이 학대로 발전하는 경향 또한 적지 않다. 이것은 ‘역치’라는 개념과 맞닿아 있다.

‘역치’는 생물체가 자극에 대한 반응을 일으키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자극의 세기를 나타내는 값이다. 간단히 ‘감각을 느끼는 최소한의 자극’이다. 아주 작은 소리는 잘 들리지 않지만, 조금씩 소리를 키우면 어느 순간 들려지는 순간이 있는데, 이 때의 소리 크기를 청각적 역치라고 한다. 심리학에서도 역치라는 개념이 사용되는데, 싫은 소리를 들어도 화가 나지 않다가도 반복적으로 싫은 소리를 들으면 어느 순간 발끈하게 되는 그 순간을 ‘심리적 역치’로 볼 수 있다. 주목해야할 점은 조금씩 그 역치의 기준점이 높아진다는 점이다.

훈육과 체벌에 적용하면, 처음에는 자녀를 살짝만 때려도 마음이 미안하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무뎌지고, 그 이후에는 좀 더 강하게 아이를 때리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역치가 한없이 상승하지는 않지만, 사람의 성향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어느 순간 그 역치가 과해지면 ‘정인이 사건’처럼 학대로 죽음에 이르게 할 가능성이 없다고 할 수 없다.

당신의 안전한가?

그동안 우리는 아이들에게 적절하게 훈육을 했던 것일까. 아니면 훈육이란 이름으로 학대를 했던 것은 아닐까. 부모의 입장에서 내가 아이에게 적절한 훈육인지, 아니면 적절하지 않는 훈육인지 돌아볼 수 있는 자가진단법 중 하나로 자신의 감정 상태를 점검하고, 확인해보라고 말한다. 본래 ‘적절한 훈육’이란, 훈육하는 사람의 감정선이 잔잔할 때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한다. 쉽게 말해 부모가 화난 상태에서 훈육에 들어가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뿐더러 감정이 실린 훈육은 학대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다.

필자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좋은 부모’가 되는 것이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일은 그 자녀로부터 ‘존경받는 부모’가 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아이들은 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자란다’고 했던가. 행복한 부모가 행복한 자녀를 만드는 셈이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아이와 함께 먹고 자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부모다움’을 갖춰나가는 치열하고 끊임없는 내적 훈련인 동시에 사회로부터 부여받은 공적 의무이자 책무이다.

당장이라도 살아 돌아와 우리 곁에 와줄 것만 같은 정인이가 내게 묻는 듯하다. 아이들이 머물러야 할 ‘당신이라는 세상’은 어떤 세상인지, 그리고 어떤 세상이어야 하는지.

아이에게 당신은 어떤 부모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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