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성화(광주 동구자원봉사센터 사무국장)

‘열 손가락 없는 등반가’ 김홍빈 대장의 수색 작업이 몇 일전 중단되었다. 무사 귀환에 대한 작은 불씨가 사라졌고, 그를 아꼈던 많은 사람들, 특히 그와 크고 작은 인연을 맺었던 수많은 광주 시민들이 벌써 그를 그리워하고 또 추모하고 있다.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가 그토록 미치고 또 닿고자 했던 그의 열망과 꿈은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그를 어떻게 기억하고 추모해야 할까.

1964년 전남 고흥에서 태어난 김홍빈은 대학시절 잘 나가는 스포츠맨이었다고 한다. 1983년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산악부에 들어간 그는 2학년 때 광주전남암벽대회에 출전, 2위에 오를 정도록 등반 기량이 부쩍 향상된 그는 89년 말 동계 에베레스트 원정에 이어 1990년 낭가파르밧 원정에도 참가했다고 한다.

그러나 1991년 북미 최고봉인 매킨리(6,194m) 단독 등반에서 동상으로 열 손가락을 잃은 김홍빈은 옷을 입는 것은 물론 대소변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게 낫겠다 싶어 약국 앞까지 다가섰던 게 수십 번이었다고 그는 고백한다. 이런 위기를 넘어서는 데는 선후배들의 도움이 컸다고 한다. 함께 살며 밥을 떠 먹여주는 것은 물론 대소변도 받아주었다고 그는 말한다. 그를 도와준 ‘주위분들’이 있었다.

선배의 권유로 장애인용 운전면허증을 따내 자동차 부품제조업체에 화물차 운전사로 근무하기도 하고, 전산실에서 근무해보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모든 직업이 오래 가지 못했다. 그래서 이렇게 지낼 바엔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에 전념하자 마음 먹었고, 그것이 산이었다고 한다. 그의 세계 7대륙 최고봉을 오르겠다는 꿈과 도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고, 터무니없다며 비웃음 지을 때 그는 빙하를 가로지르고, 설벽을 넘어서면서 ‘장애인은 어렵다’라는 사회적 냉대와 차별을 보란 듯이 넘어서 왔다. 1997년 여름, 엘브루즈(5,642m, 유럽)를 시작으로, 칼스텐즈(4,884m, 오세아니아), 빈슨매시프(4,897m, 남극), 킬리만자로(5,895m, 아프리카), 매킨리(6,194m, 북미), 아콩카과(6,959m, 남미), 그리고 2007년 봄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8,848m, 아시아) 등정 성공까지, 그의 꿈은 단 한번도 멈춰서질 않았다. 로프와 피켈을 붙잡을 수 있는 손가락 하나 없이 장애인 최초로 7대륙 최고봉과 히말라야 14좌를 모두 완등한 셈이다.

필자는 광주YMCA 활동가로 근무하며 김홍빈 대장님을 처음 만나 뵐 수 있었다. 신년 첫 시무식으로 무등산 등반을 하였고, 그때 흔쾌히 함께 동행해주시고, 격없이 따뜻한 말씀과 눈웃음을 지어주셨다. 사람(人)과 산(山,) 그와 맺는 인연을 무척 귀하게 여겨 주셨다.

그는 그렇게 수많은 장애 체육인, 청소년, 광주 산악인들에게 희망의 좌표가 되어주셨다. “열 손가락을 모두 잃었지만, 그때부터 내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어요. 두 손이 있을 때는 나만을 위해 살았는데, 두 손을 잃고 나서야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게 되었다”는 그의 고백은 무등산처럼 기품이 있고 또 깊이 있었다.

사고가 날 경우 “지금까지 주위분들로부터 도움을 받고 산을 다녔는데, 죽어서까지 폐 끼치고 싶지 않다”며 마지막까지 2차 사고를 염려한 김홍빈 대장은 그렇게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고, 또 전부였던 히말라야에서 마침내 영면하게 되었다.

“코로나19로 어려운 시기에 국민들께 힘이 되고 싶었다”라는 그의 각오는 이미 우리의 가슴에 남아 다시 역경을 딛고 일어설 희망의 근거를 만들고 있다.

김홍빈 대장이 그토록 마지막까지 오르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히말라야 브로드피크 꼭대기’가 아닌, 이젠 지치고 힘들어 그만 내려놓고 싶은 우리 모두에게 “기어오르고, 또 기어올라 마침내 이뤄내는 불굴의 투혼’은 아니었을까. 그것이 바로 우리가 영원한 대장(大將), 대한민국 대표 산악인 김홍빈을 계속 기억해야 할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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