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일 남도일보 편집국장

일제강점기인 1896년 5월 5일 인천에 곡물거래소라는 것이 문을 열었다. ‘기미(期米)시장’, ‘미두장(米豆場)’이라 불리던 미두취인소(米豆取引所)다. 주거래 품목은 쌀이었다. 취인소는 곧이어 쌀 이출항인 부산과 목포, 군산 등에도 들어섰다.

소비에 상시적 특성을 갖고 있는 곡물은 생산 시기가 한정되고 자연재해나 전쟁 등 예측할 수 없는 요인으로 생산량에 영향을 받아 가격변동이 심한 편이다. 이때의 손실을 최소화하고 거래의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장치가 취인소다.

하지만 취인소 등장의 진짜 배경은 따로 있었다. 쌀은 조선에서 경쟁력이 있는 상품이었다. 개항 2년 후 인천에 결성된 객주조합이 그 상황을 짐작하게 한다. 당시 객주들은 전국 각지에서 실려 오는 미곡의 집산을 도맡아 인천항에서 거래되는 모든 물화의 상권까지 장악했다. 그만큼 유통조직이 탄탄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일제가 굳이 일본인 미곡상 14명이 낸 취인소에 허가를 내준 것은 조선인 객주들을 통해 넘겨받던 미곡을 직거래함으로써 그들의 손발을 묶고 유통조직까지 와해시키려는 검은 의도가 숨어 있었다.

취인소에서 미두꾼들은 10% 보증금만으로 물품의 인도 시기와 결제시기가 다른 ‘청산거래’ 방식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 물론 중개는 일본인이 독점했다. 최소 매매 단위는 100석(15∼20t)이었는데 수 천석을 거래하는 큰 손을 ‘오데(大手)’, 작은 손을 ‘마바라(まばら)’고 했다.

1920년대에 일제는 조선을 식량공급지로 만들어 더욱 많은 쌀을 생산, 그 쌀을 일본으로 가져가려 기를 썼다. 자연스럽게 미곡시장은 활황이었다. 취인소에서 시세 차익을 노린 투기 광풍이 불기 시작했다. 취인소가 처음 문을 열었을 때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던 조선인들도 주변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점차 많은 자본을 가진 투자자만이 아니라 지식인과 상인, 시골의 대소 지주, 가진 것 없는 머슴이나 평범한 서민들까지 부나방처럼 투기장이 된 취인소로 뛰어들었다.

이들 중 일시적으로 성공을 거머쥔 이들도 있었다. 강화출신 반복창(潘福昌·1900~1939년)은 일찍이 미두장에 뛰어 들어 재산을 40만 원(현 시세 400억 원)으로 늘려 미두왕(米豆王)에 등극한데 이어 1921년 5월 미의 여신으로 명성이 자자한 ‘원동(苑洞)의 큰 재킷’ 김후동(金後童)과 조선호텔에서 초호화 결혼식을 올려 유명세를 탔다.

그러던 그도 시세 예측이 거듭 빗나가면서 2년 만에 재산을 탕진하고 비참한 삶을 살다가 1939년 10월 쓸쓸한 생을 마쳤다. 이처럼 대다수 사람들은 일확천금을 꿈꾸며 투기열풍에 빠져 보지만 빈털터리로 전락했다.

현실적으로 쌀값의 변동을 예측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식량정책과 경제동향, 일기예보 분석, 일본의 현물경제 등 나름의 정보와 청산거래의 방법과 절차 등에 전문지식이 필요하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조선인 미두꾼에게는 아는 것이 없었다. 반면에 몇몇 미두점이 단합하면 쌀값을 조작하는 일은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었다.

신태범의‘인천한세기’에 “조선인 미두꾼이 1915년부터 15년 동안 취인소에 바친 돈은 당시 돈으로만 해도 수억 원이 될 것”이라고 기록된 것을 보면 그 광풍의 정도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케 한다.

1924년 8월호 잡지 개벽(開闢)에는 취인소를 가리켜 ‘피 빨아들이는 악마굴’ 이라며 “조선인의 생활난이 여기에서 일어나고 장차 조선인 공사 경제의 파멸로 이로부터 다 닥칠 날이 멀지 않다”는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이광수의 소설 ‘재생(再生)’, 채만식의 소설 ‘탁류(濁流)’와 희곡 ‘당랑(螳螂)의 전설’에도 취인소의 폐해가 잘 그려져 있다. 채만식은 “모나코의 몬테카를로 도박장의 축소판”이라고 규정하기까지 했다.

도박 성격이 강한 미두는 또 다른 형태의 노름을 부추겼다. 취인소 근처에서 미두에 실패한 사람이 궁여지책으로 하는 ‘절(節)치기’와 취인소 뒷골목에서 한 번에 10전에서 1원을 걸고 하는 ‘공미상장(空米相場)’ 이 그것이다. 이처럼 조선의 미두 투기 열풍은 1930년대 후반까지 계속됐다.

그러나 중일 전쟁 이후 일제가 통제 경제를 추구하면서 미곡의 자유 거래를 금지하자 그 열풍도 사라져 갔다. 1939년 총독부는 조선미곡시장주식회사를 만들어 전시 미곡 유통을 대행하게 하면서 전국의 미곡취인소를 모두 폐쇄하면서 미두시장은 43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도박이나 투기 열풍은 특정한 시대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식민지 시대 생겨난 미두 열풍은 이전에 볼 수 없던 생소한 것이었고 여기에 가담한 조선인에게 패가망신을 안겼다.

쌀은 이제 과거 황금과 같은 일확천금의 대상이 아니다. 그 가치에 상관없이 사실상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했다. 추수기가 다가오면 언제나 남아도는 쌀로 생산자나 정부 모두 골치 아파한다. 옛 미두꾼이 현 상황을 보면 아마 뒤로 자빠질 일이다. 한 세기 만에 쌀의 가치가 이렇게 변한 것을 보면 격세지감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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