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 강제이주, 아리랑 로드 6,500km
고려인들 아리랑으로 하나돼 고난 극복
가슴으로 기억…한글 몰라도 아리랑은 알아

고려인 강제이주 출발지, 연해주 라즈돌노예 역./네이버 블로그
고려인 6,500km 강제이주 경로./donga,com

1910년 국권상실이후 러시아 연해주 지역은 우국지사들이 모여든 항일독립운동의 요람이 되었다. 민족의 영웅 안중근 의사, 러시아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이범윤, 이상설, 이위종 등이 연해주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1920년대 들어 일제의 보복전과 러시아혁명의 여파로 불거진 내부 갈등 등으로 독립군 세력이 크게 위축 되었으나 연해주 고려인 숫자는 계속 늘어나 1930년대에는 20만명을 헤아렸다.

스탈린은 1937년 8월 고려인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시키는 명령을 내렸다. 이른바 디아스포라(Diaspora) 역사가 시작 되었다. 고려인과 외모를 분간하기 어려워 일본 간첩의 침투를 막겠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으나 노동력이 부족한 중앙아시아를 개발하려했고 고려인의 군사조직화를 막기 위해 강제이주를 관철 시켰다.

연해주 우스리스크를 가는길에 라즈돌노예(Razdolnoye)역이 있다. 스탈린은 1937년 9월부터 12월까지 고려인 동포들을 이곳으로 집결시켜 카자흐스탄 우슈토베 까지 6,500km를 강제이주 시킨다. 17만명이 넘는 고려인들은 왜 끌려가는지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른 채 시베리아 횡단열차 화물칸에 짐짝처럼 실려 옮겨졌다.

한달간 6,500km를 달리던 과정에서 1만명이 넘는 한인들이 숨졌다. 카자흐스탄 우슈토베에 도착한뒤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질병,추위, 굶주림 등으로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 많았다. 고려인들은 황무지에 내던져졌어도 맨손으로 토굴을 파고 논밭을 일구며 정착하기 시작했다.

고려인들은 어린 시절 할머니, 어머니와 함께 업혀 들었던 아리랑 가락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기억한다. 고려인들의 아리랑은 항상 슬프지만은 않는다. 아리랑은 척박한 삶을 살아내는 동안 그들을 지탱해준 위로와 희망의 주문이었다. 아리랑은 그들의 삶이 고스란히 기록 되어 있다.

전 세계에 퍼져 살고 있는 한민족의 동질성을 나타내는 노래 아리랑은 어떤 의미를 주고 있는가? 신명과 흥이 넘치는 유전자가 한민족의 특성이라는 것은 여기서 증명된다. 고달픈 생활의 만리타국에서 아리랑을 함께 부르면 그들은 하나가 된다. 유라시아의 광활한 대지에 흩어져 살고 있는 50만 고려인들은 우리 한국말은 잘 몰라도 아리랑 가락은 부를 줄 안다. 아리랑하면 떠오르는 느낌은 한(恨)이다. 그러나 아리랑은 한을 넘어서 우리 민족의 고통극복의 에너지이고 삶이고 역사이다. 마침내 우리민족이 하나가되는 원천이고 우리 민족의 동질성을 나타내는 대표적이 노래이다. 조국과 고향을 멀리한 사람들에게 아리랑은 위로이고 희망이다. 연해주에서 6,500km를 달려온 고려인의 이동경로에 아리랑은 항상 함께 있었고, 현재도 미래도 아리랑은 우리 모두와 함께 할 것이다./김소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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