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군 양순·유격장군 양보숭 후손
양팽손 개혁정치사상 가학으로 전승
전란 예견하고 양병 준비한 학자들
유물 보존하며 종택 복원 정신계승 힘써

한류콘텐츠 보물창고 광주전남 종가 재발견
조선 차와 함께 의로운 전통 잇는 명가

통덕랑공 종가 영모재
통덕랑공 종가 영모재

‘녹차 수도’ 전남 보성의 득량에는 조선 전통차 향기를 머금고 430여년 고장을 지켜온 제주양씨 통덕랑공종가가 있다. 양씨 집성촌인 박곡(박실)마을 뒷산은 고차수(국가농업유산 제11호) 등이 야생하는 차밭이 펼쳐져 있고 차밭밑 마을 어귀에는 오매정과 다전지 연못이 현존한다. 이순신장군이 임시 수군통제영을 설치해 수군재건에 나서는 발판이 됐던 보성 제주양씨 학포공파 통덕랑공 종가를 찾아 가문의 내력을 알아본다.

◇탐라왕 양을나 시조
제주양씨는 단군시기 탐라국을 개국했다고 알려진 양을나를 시조로 모신다. 그는 한반도 토성 중 가장 긴 역사를 가진 토족인 양씨의 시조로서, 고씨의 시조 고을나, 부씨의 시조 부을나와 함께 제주 한라산 삼성혈에서 솟아난 신인이며 그들의 맏형으로 탁라국(탐라국) 첫 왕이 됐다는 시조설화가 전해진다. 후손 양탕이 559년 신라 진흥왕에게 사신으로 예방해 양씨(梁氏) 성을 받아 개칭했다고 한다.

양순(?~?)은 682년 신문왕조에 신라에 들어가 한림학사를 지내고 한라군에 봉해졌다. 그가 제주양씨 중시조다. 양보숭(1171~?)은 고려 명종 때 지방 호족으로 유격장군을 역임하고 삼중대신에 올랐고 광주 양과동 충덕사에 배향됐다. 제주양씨 학포공파는 그를 중조로 세계를 잇고 있다. 5세 양석재(1310~?)는 충혜왕 때 문과급제하고 문하시중에 올랐다. 공민왕을 보좌해 반원정책과 왜구, 홍건적 등을 섬멸하고 국토 수복에 공을 세웠다.

◇기묘명현의 학문과 절의 이어
11세 양팽손(1488~1545, 호는 학포)은 청백리 송흠에게 학문을 배우고 문과 급제해 조광조와 함께 사가독서하며 개혁의 뜻을 나눴다. 이를 바탕으로 소격서 혁파, 위훈 삭제 등 개혁정치에 앞장섰다. 정언, 수찬, 교리를 역임하고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소두(상소 대표자)로서 항소하다 관직을 삭탈 당했다. 조광조가 능주 유배 중 사약을 받자 예로서 장례 치르고 사당을 세워 위로한 후 쌍봉사 인근 학포당에 은거했다. 21년만에 복직되고 용담현령으로 공직을 마감했다. 두사람의 절의와 우정을 기리며 수원 삼곡서원과 능주 죽수서원에 나란히 배향됐다. 그는 산수도 등 명화와 학포유집을 남겼고 학포공파를 열었다.

양팽손의 아들 8형제 중 둘째 양응태(?~?, 호는 후포)는 경학 탐구에 막힘이 없는 문사로서 기대승, 유희춘과 도의로 교유했다. 문과 급제해 예조참의, 정주목사를 역임했고 서장관으로 중국에 갔다가 풍랑을 만나 생을 마감했다. 그의 동생 양응정(1519~1581, 호는 송천)은 천문 지리 병법까지 연구해 향토방위와 양병설을 주장한 선각자다. 과거 답안 ‘남북제승대책’과 과거시험 출제문 ‘천도책’을 비롯한 글들이 명문장으로 알려졌다. 벼슬은 공조참판, 대사성에 올랐고 명에 성절사로 다녀왔다. 광주 박산마을 임류정에서 백광훈, 최경창, 최경장, 최경회, 박광전, 안중묵, 정철, 신립, 정운, 양산숙(둘째아들) 등 역사에 빛나는 후학들을 양성했다.

◇득량으로 나라 구한 가문 전통 계승
12세 양응덕(1522~?)은 가학에 충실하며 통덕랑으로 동부참봉을 지냈다. 함양오씨 오세장의 딸과 혼인해 보성 득량 송곡리 박실(박곡)마을에 입향해 통덕랑 종가를 열었다. 그의 장남인 13세 양산항(1554~1634)은 박광전·안중묵·안방준·정사제 등과 교유하고 이순신의 수군재건을 도와 난중일기에 기록됐다. 이순신 백의종군 당시 조선 수군이 칠천량해전에서 대패했을 때 복귀명령을 받았던 이순신에게 수군을 파하고 육군에 합류라는 어명이 내렸다. 이순신이 “신에게는 12척의 배가 있사옵니다”며 수군재건 장계를 올릴 수 있었던 것은 양산항 집에 모여든 장수들과 인근 조양창에 보관된 군량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순신이 보성 박실마을 양산항가에 3박4일 머문 동안 ‘득량(得糧)’이라는 의미로 군량미를 얻고, 12척 판옥선의 존재를 확인하고, 송희립·최대성·소계남·안위 등 장수들과 무기제조기술자들이 모여들어 10일만에 수군 재건 준비가 가능했다.

16세 양우성(1627~1681)은 우산 안방준의 외손으로 구휼미 100석을 내놓고 구호소를 설치해 대기근의 백성 규휼에 앞장섰다. 그의 동생 양우급(1630~1683)이 과거 급제하고 절충장군 전라도병마절도사에 올랐다. 종가는 이순신장군이 복통이 일면 복용했다는 떡차와 접빈다례의 전통을 이은 양주하, 양식, 양순, 양덕환 등 다인들을 배출하며 17대를 잇고 있다. 종손 양홍열씨(보성삼베협동조합 이사장)는 "차밭밑 마을 입구 다전지와 오매정 옆이 종가 종택이 있던 장소라고 전해지고 있다"며 선조의 절의정신 계승을 위해 종택 복원에 힘쓰고 있다. 
/서정현 기자 sjh@namdonews.com

오매정
오매정
제주양씨 집성촌 박실마을 연못
제주양씨 집성촌 박실마을 연못
보성 다전마을 고차수. (수령 430년, 국가중요농업유산 제11호)
보성 다전마을 고차수. (수령 430년, 국가중요농업유산 제11호)
종가 외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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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가 사랑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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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실마을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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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가 내림 다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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