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콘텐츠 보물창고 광주전남 종가 재발견
목숨 건 효행 … 빛나는 효자 가문

수로왕비 허황옥 후예 가락국 왕손
고려 태조 부마 허사문 시조
하서 문인 성리학자 종가 열어
가학 이어 학덕·충효 전통 계승

 

영귀서원 전경
영귀서원 전경

400년 고목 왕버들 12그루가 수려한 자태를 뽑내고 섬진강 상류 삼기천이 유유히 흐르는 전남 곡성군 겸면의 현정마을에는 영귀서원이 있다. 이 서원에서 정지장군의 옥과전투 격전지 장군봉을 바라보며 충의정신을 키우고 서원의 주벽(주된 추모인물)인 하서 김인후 선생의 철학과 경학을 따라 익혔던 인물들을 배출한 가문이 곡성 태인허씨(泰仁許氏) 가문이다. 훌륭한 선조의 학덕을 효행으로 계승하고 있는 태인허씨 지평공후 도봉공파 종가를 찾아 가문의 내력을 살펴본다.

◇모계 성을 잇는 2천년 역사
태인허씨는 가락국 김수로왕의 왕비 허황옥을 기원으로 하는 허씨에서 분관해 2천년 역사를 가진다. 인도 아유타국(갠지즈강 상류 아요디아 왕국) 공주였던 허황옥은 16세 되던 서기 48년에 어머니 꿈에 나타난 신인의 계시에 따라 20여명의 일행과 함께 가락국왕을 찾아 결혼하기 위한 항해를 나서서 창원 진해 망산도에 정박했다. 가락국왕 김수로의 영접을 받고 명월사에서 그와 국제 결혼함으로써 가락국 왕비가 됐다고 삼국유사에 기록됐다. 그녀는 157세를 사는 동안 10명의 왕자와 2명의 공주를 낳았고 이중 두 아들에게 어머니 성씨인 허씨를 하사했다고 한다.

허사문(許士文, ?~?)은 허황옥의 30세 손으로 고려 태조 왕건의 부마였으며 시산군에 봉해졌다. 태인허씨는 허사문을 시조로 모신다. 6세 허포(?~?)는 고려조 기천현령, 풍해도관찰사를 지내고 태산군에 봉해져 중조가 된다. 허포의 증손자인 9세 허잠(?~?)은 예의전서를 역임했고 그로부터 태인(태산현과 인의현 합명)을 본관으로 하는 허씨가 계대를 잇고 있다. 허잠의 증손자 12세 허경(?~?)이 좌우위보승 중랑장을 지냈고, 그의 아들 6형제로 인해 가문이 중흥한다. 그의 아들 중 셋째 허사의(생원공파)는 화순 동복에 입향했다. 넷째 허사행(직장공파)은 직장을 지내고 부안에서, 다섯째 허사효(진안공파)는 진안현감을 지내고 고부에서 세거를 시작했다. 여섯째 허사제(사평공파)는 사평을 지내고 금구에 이주했다.

◇중랑장 허경 중흥조, 지평 허사문 파조
허경의 둘째아들인 13세 허사문(許斯文, 1407~?)은 세종 때 문과 을과 장원으로 급제하고 성균관전적, 양천·금구·보령·낙안 등의 수령을 거쳐 경상도사, 평안도사, 사헌부지평을 역임했다. 그가 전북 고부에서 부안으로 입향해 지평공파를 열었다. 허사문 둘째 아들 허곤원(?~?)이 곡성 옥과로 이주했다. 허곤원의 손자인 16세 허숙현(1481~1525)은 진사시 생원시에 합격했다.

18세 허계(1527~?, 호는 도봉)는 하서 김인후의 문인으로 생원시에 합격하고 정철·양자징·기효간 등과 교유했으며, 문집을 남겼다. 그는 김인후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된 곡성 영귀서원에 유팽로·위백규·신이강·허소와 함께 추가 배향됐다. 그가 도봉공파 종가를 열었다. 허계의 형 허소(1525~1602, 호는 설암)는 온화한 성품으로 효제를 실천하며 김인후에게 학문을 배워 뛰어난 학행으로 알려졌으며 스승과 주고받은 시와 문답을 문집에 남겼고 우애 좋았던 동생 허계와 나란히 영귀서원에 배향됐다.

◇군자의 道 배워 대대손손 효자 배출
허계의 손자인 20세 허섬(1589~?, 호는 죽헌)은 효행이 독실하고 가학을 이어 경학을 강학한 문인이다. 그는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괄의 난에 의병 창의해 군량 700석, 군포 15동, 종이 700권을 모아 인조가 있는 강화도로 운송한 후 상소를 올려 임금으로부터 충의를 인정받았다. 병자호란 때는 이흥발과 함께 의병 창의해 청주까지 나아갔으나 화의가 맺어져 귀환한 후 은거했고 창의사에 배향됐다.

21세 허국빈(1612~?, 호는 초당)은 진사시에 합격했고 허섬과 함께 병자호란 의병에 참여한 후 초당을 세워 은거했으며 문집을 남겼다. 허소의 손자 20세 허정량(1591~?)은 7살에 정유재란을 만나 적에게 붙잡힌 아버지를 몸으로 감싸고 칼을 손으로 막으며 자신을 죽이고 대신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외침으로써 적장을 감동케 했다고 한다. 그의 효성을 본 적장은 ‘이 아이는 하늘이 내린 효자니 뒷사람도 헤치지 말라’는 글을 써 줘 가족을 살렸다. 훗날 옥과현감 이흥발이 이 사실을 알아보고 효자정려를 내렸다고 한다. 26세 허관(1714~1765)과 29세 허상두(1871~?)가 효자로서 삼강록에 등재됐고, 허권, 허시, 허형, 허서 등 대대로 효자를 배출했다. 종가는 영귀서원 등 유적을 보존하며 가문의 효행 전통 계승에 힘쓰고 있다.
/서정현 기자 sjh@namdonews.com

효자허정량정려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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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귀사. 김인후를 주벽으로 허소, 유팽로, 위백규, 허계, 신이강의 위패가 봉안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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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정마을 앞 400년 된 왕버들 12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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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귀서원 강학당. 우측에 장군봉이 보인다. 장군봉의 장군은 고려말 왜구의 침략에 맞서 옥과전투를 비롯해 영광 남해 등지에서 왜군을 섬멸했던 정지장군을 지칭한다. 마을 앞 삼기천 건너에는 정지장군의 전적비가 세워져 있다.
영귀서원 강학당. 우측에 장군봉이 보인다. 장군봉의 장군은 고려말 왜구의 침략에 맞서 옥과전투를 비롯해 영광 남해 등지에서 왜군을 섬멸했던 정지장군을 지칭한다. 마을 앞 삼기천 건너에는 정지장군의 전적비가 세워져 있다.
영귀서원 외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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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정마을 앞 400년 된 왕버들 12주영귀서원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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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귀서원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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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재허섭권학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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