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콘텐츠 보물창고 광주전남 종가 재발견

남송 출신 귀화 학자 범승조 시조
불사이군 두문동 72현 범세동 후손
대대로 학문하며 광주 생룡동에 세거
복룡사 유허에서 절의지킨 선조 계승

성리학에서 꽃피운 절의(節義) 명문
영산강 상류 극락강이 흐르는 옛 무진벌 앞 생룡마을에는 ‘불사이군’ 절의를 지키며 학행의 가통을 계승하고 있는 금성범씨 후손들이 세거하고 있다. 송나라와 절의를 지켜 고려에 귀화하고 그 후손은 다시 고려에 절의 지켜 조선왕조의 부름에 두문불출했다. 남송의 주자학으로부터 조선의 성리학, 도학으로 꽃피운 유교사상의 발전 경로를 가문의 역사로 하여 대대로 가학을 이어온 금성범씨(錦城范氏) 대종가를 찾아 가문의 내력을 살펴본다.

복룡사 강학당이었던 용호재

◇범유수 여진정벌 공신돼 금성을 본관으로
금성범씨는 송-원 교체기 중국 낭야 사람으로 고려에 귀화한 범승조를 시조로 모신다. 그는 충선왕과 결혼한 원나라 계국공주(쿠빌라이의 딸)의 수행을 자청하여 사신으로 와(1298년) 귀화했다. 그는 남송의 예부시랑을 지냈고, 교체된 왕조 원나라에서 벗어나기 위해 원행을 결심해 ‘역전’, ‘사서집주’, ‘백가예설’ 등 주자의 문헌들을 들여와 개경에서 강학하고 보급했다. 학덕의 공으로 사패지를 나주로 받아 노년에 나주 진해진(현재의 광주 광산 본양, 덕림동)에 정착했다. 그의 아들 범유수(?~?)는 충숙왕 때 여진정벌의 공훈으로 금성군에 군봉됐다. 이로인해 한반도에 동래한 범씨가 금성(나주의 옛지명)을 본관으로 삼게 됐다. 범씨의 득성 설화는 중국 요임금의 자손 유루가 어룡씨를 하사받고, 상나라에서는 시위씨, 서주시대에는 당두씨를 사용했다가, 춘추전국시대 진나라 때 복주의 범현을 식읍으로 받아 범씨 성을 쓰게 됐다고 한다. 범문자, 범려, 범증 등의 후손인 범승조가 한반도에서 대를 잇게 돼 가문의 뿌리가 3천년에 이른다.

4세 범세동(?~?, 호는 복애)은 포은 정몽주의 문하에서 공부해 문과 급제하고 덕녕부윤 간의대부를 지냈고 원천석과 함께 ‘화해사전’, ‘동방연원록’ 편찬에 참여했다.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 은거했다가 나주로 낙향했다. 태조와 태종의 출사 권유에도 끝내 사양했다. 그는 설총, 최충, 김양감, 안향, 이색으로 전해지는 고려 인물들의 학문 계통과 그 행적을 기술한 ‘화동인물총기’를 저술했고, ‘북부여기’를 통해 고조선에서 고구려로 이어지는 민족사 국통을 밝히고 천부경을 쉽게 풀이해 고유 사상의 계승발전에 기여했다. 불사이군 충절을 기려 개성 표절사, 광주 복룡사, 두문동서원, 경현사 등에 배향됐다.

◇진주성에서 순절한 형제 의병장
9세 범가용(?~?, 호는 학봉)은 도학자로서 유집을 남겼으며 지방 유림에게 덕행을 존경받아 복룡사에 배향됐다. 11세 범천배(1496~?, 호는 용계)는 눌재 박상의 제자로서 도학을 연구해 강론한 학행으로 알려져 복룡사에 배향됐다. 그가 광산 본양에서 광주 생룡동으로 입향했다.

13세 범기생(1553~1593, 호는 죽천)은 지용을 갖춘 의병장으로 우계 성혼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공부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담양의 의병창의 회맹에 참여해 김천일 장군과 함께 수원 등 수많은 전투에서 활약했다. 1593년 김천일, 최경회, 고종후, 황진 장군과 함께 진주성을 사수하는 전투에서 역부족으로 패전하고 남강에 투신, 순절했다. 선무원종공신에 녹훈됐다. 그의 동생 범기봉(1557~1593, 호는 성와)은 효성과 우애가 깊고 경서에 능했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 범기생과 함께 의병 창의해 활약했으며 진주성에서 순절해 사헌부지평에 추증됐고 형제 모두 광주 복룡사에 배향됐다.

◇광주 3·1운동 참여로 정신 계승
범기생의 아들로 13세인 범진후(1609~1684, 호는 양성제)는 장대한 기골로 학문과 무예를 닦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정대명 등과 함께 전라병마절도사 김준룡이 이끄는 근왕의병에 참여하여 경기도 광교산 전투에서 활약한 ‘6호장’ 중 한사람이다. 정조 때 공조참의에 추증됐다. 21세 범윤두(1891~1958)는 생룡동에서 태어난 독립운동가다. 그는 1919년 대소서 직원으로 근무하던 중 3월 10일 광주 작은 장터에서 전개한 독립만세운동에 선언서와 태극기를 인쇄해 군중에 나눠주고 만세시위를 이끌었으며, 목포 등 인근지역에 경고문, 독립가 등을 등사해 배포하는 등의 항일활동으로 수배돼 3년의 옥고를 치룬 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됐다. 종가와 대종회의 후손들은 실전되었던 범세동 묘지를 되찾고(광주광역시 기념물 제23호), 고종 때 훼철된 복룡사의 강학공간 용호재를 중건하며 선조들의 불사이군 충절 정신 계승에 힘쓰고 있다.
/서정현 기자 sjh@namdonews.com

복룡사 유허비각.
금성범씨세거지 표석
생룡마을 표지석.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의 탄생지로 추정되는 명당지라고 생룡이란 이름을 사용했다고 한다. 영산강 상류 극락강과 기름진 무진벌 들판을 앞에 둔 명촌이다.
죽천 범기생 순의숭모비. 범기생은 동생 범기봉과 함께 임진왜란 의병창의해 진주선전투에서 김천일장군 부대에서 싸우다 남강에 투신 순절한 공신이다.
용호재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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