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콘텐츠 보물창고 광주·전남 종가 재발견

고려 상서 박선 중시조, 함양이 본관
고려엔 명문세가, 조선엔 충절가문
전란 후 향촌자치… 대동계 창설 주도
간죽정·분재기 등 유물 보존 힘써

명촌 구림 미풍양속 지킨 문장가 가문

간죽정 전경

명산 월출산 서쪽에는 영산강을 서호로 칭하며 기름진 옥토에서 향촌자치의 수범을 만들고 지켜온 전라도 3대 명촌인 영암 구림마을이 있다. 삼한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설화와 역사를 품고있는 마을에서 세거하며, 평화 시에는 도학으로 학덕을 쌓고 풍속을 이끌며, 환란 시에는 충절 창의로서 고장과 나라 지키기에 앞장선 가문이 있다. 함양박씨 오한공파 초은 종가를 찾아 가문의 내력을 살펴본다.

◇속함대군 박언신 시조
함양박씨는 신라 54대 경명왕의 셋째아들 속함대군 박언신을 시조로 모신다. 박씨 족보에 따르면 경명왕은 여덟 아들을 두었는데 밀양박씨는 박언침(밀성대군), 고령박씨는 박언성(고양대군), 함양박씨는 박언신(속함대군), 죽산박씨는 박언림(죽성대군), 상주박씨는 박언창(사벌대군), 전주박씨는 박언화(완산대군), 순천박씨는 박언지(강남대군), 월성(경주)박씨는 박언의(월성대군) 등이 각 분관성씨의 시조가 된다. 박언신의 후손 박선(?~?)은 고려 예부상서를 지냈고 함양군에 봉해졌다. 함양박씨는 그를 중시조로 모시고, 본관을 경남 함양으로 하여 세계를 잇고 있다.

박선의 아들 손자 등 5세까지 5대가 연이어 상서에 올라 가문을 중흥시켰다. 2세 박인정(?~?)과 3세 박신청까지 3대가 예부상서를 지냈고 4세 박윤정은 판호부상서 태부경치사를 지냈다. 5세 박신유(1212~?)는 고려 고종 때 나주에서 초적 이연년의 난을 평정하고 응천군에 봉해졌고 판이부상서를 지냈다. 박신유의 여섯 아들이 알려져 여섯 지파로 분파된다. 셋째 박지량은 여몽연합군의 일본정벌에 지병마사로 참여했으며 원나라로부터 무덕장군 관군천호 벼슬을 받았다. 좌군만호로서 북방에 침략한 외적을 무찔렀다. 벼슬은 판삼사사, 동북면병마사, 경상전라도도순문사 등을 역임했다.

◇고려사에 기록된 명문가
박신유의 둘째 아들인 6세 박지빈(?~?, 시호는 문원공)은 위위윤을 지냈고 그의 아들 박장, 박리, 박겸, 박계원 등 4형제가 모두 과거 급제했다. 군부총랑을 지낸 박장의 아들 박충좌(1287~1349)는 과거 급제해 전라도안렴사를 역임할 때 아첨으로 왕의 총애를 받던 관료가 양민을 노비로 삼으려 하자 반대해 왕명까지 거부한 행적으로 유배됐다가 복권됐다. 밀직제학, 개성윤을 거쳐 찬성사로서 서연에서 정관정요를 강론하고 판삼사사, 순성보덕협찬공신으로 함양부원군에 봉해져 고려사 열전에 기록됐다.

7세 박계원(?~?)은 과거 급제하고 병부상서를 지냈으며 상서공파를 열었다. 그의 증손자인 10세 박성건(1418~1487, 호는 오한)은 총명하고 독실한 도학자로서 문과 급제해 훈도, 전적을 거쳐 장수현감을 지냈다. 부인 난포박씨 친가가 있는 영암 군서의 구림마을로 낙향해 간죽정을 세우고 학문연구과 후학양성에 전념했다. 그가 금성(나주)훈도로 있을 때 제자 10명이 소과에 급제한 기쁨과 나주 지방 산천 경계의 빼어남을 노래한 ‘금성별곡’을 남겼다. 금성별곡은 조선 전기 경기체가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금강별곡(박순우), 만고가(박이화) 등에 영향을 미쳤다.

◇절의정신을 의병창의로 계승
박성건의 큰아들 박권(1465~1506,호는 고광)은 의롭고 강직한 성품의 관리로서 문과 급제하고 태인현감, 사간원정언을 역임했으나 연산군 때 무오사화에 화를 입어 길주, 해남 등으로 유배되고 해배되자 낙향해 여생을 보냈다. 죽정서원에서 추모한다. 12세 박규정(1493~1580)은 효성이 지극하고 시문에 능했으며 중종조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구림대동계를 중창했으며 영암향약을 창설하고 향안을 마련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가문의 성장에 기여한 그를 죽정서원에서 추모한다. 13세 박흡(?~1593, 호는 육우당)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창의했고 김천일 장군과 함께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해 공신록에 올랐다. 그가 자랐던 육우당이 소실된 후 1740년경에 중건돼 구림대동계사 옆에 현존한다.

박권의 증손자인 14세 박승원(1573~1640, 호는 설파)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버지 박대기(1537~1601)와 함께 의병 창의했으며, 정유재란에 다시 의병을 이끌고 이순신장군 막하에서 계원도유사가 돼 군사·군량을 조달했다. 이괄의 난(1624년)에도 의병을 모았으며, 병자호란(1636년)에도 조행립, 이흥발 등과 함께 근왕병과 군량을 모집했다. 죽정서원에 제향됐다. 15세 박성오(1589~1651, 호는 조양재)는 무과에 급제하고 부친 박승원과 함께 이괄의 난, 병자호란에 임금을 호종한 공으로 정사공신과 진무공신이 됐다. 1893년 송용신이 영정을 그려 조양재영당에서 보존한다. 16세 박유함(1631~?, 호는 초은)은 구림대동계의 미풍양속을 지키며 초은종가를 열었다. 그 후손들이 14세 동안 구림에 세거하며 대동계를 이끌었다. 후손들은 박성건의 부인 난포박씨가 작성한 분재기(길이 5.25m) 등 고문서를 비롯해 간죽정, 죽정사, 충의사, 육우당 등 전승 유산을 보존하며 선조의 학덕과 충절 정신을 계승하는데 힘쓰고 있다.
/서정현 기자 sjh@namdonews.com

죽정서원 전경
충의사
죽정서원 강례당
간죽정과 죽정서원 전경
죽정사
육우당
조양재 영당의 박성오 영정
간죽정 판액 ‘금성별곡 병서’

당신을 위한 추천 기사

"광주전남 지역민의 소중한 제보를 기다립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남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