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콘텐츠 보물창고 광주·전남 종가 재발견

신라 경순왕 6왕자 김정 청주에 세거
명당에 터잡아 5백년 가학 전통 이어
향촌 풍속 이끌며 인재 배출한 가문
고문서·동백정 등 보존하며 정신 계승

풍수 명당 동백정에 미풍양속 보존한 가문

보본사와 종가 전경

전남 장흥 탐진강 상류의 부산면 호계리에는 조선 태조부터 네 임금을 섬긴 명신 김린이 명당에 세운 복합공간 동백정이 있다. 벼슬을 내려놓고 아름다운 향촌마을에 터 잡아 선비들과 시문과 학문을 나누고 후학을 양성하던 선조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이 정자는, 때론 강론하는 서당으로, 때론 향약 집회소로, 대보름에는 나라와 고장의 평화를 기원하는 민속제전의 장소로 사용됐던 정자다. 흐르는 강물처럼 5백년 역사를 지키며 무수한 인걸들을 키워낸 동백정을 가꾸고 보존해 온 장흥 청주김씨 대종가를 찾아 가문의 내력을 살펴본다.

◇신라경순왕 왕자 김정 시조
장흥에 세거하는 청주김씨는 신라 경순왕의 여섯째 왕자 김정을 시조로 모신다. 청주김씨 대동보에 따르면 경순왕의 왕자 김정이 청주에 군봉되고 그의 10세 후손 김보(?~?)가 금오위대장군으로 청주백에 봉해져 구봉산 아래 오동촌에서 세거했고, 청주를 본관으로 하는 후손들이 김보를 중시조로 모시게 됐다고 한다.

김보는 세 아들을 두었는데 김예, 김록, 김양이다. 둘째 김록의 손자가 의정부 좌찬성을 지낸 김린이다. 그가 장흥부사로 부임해 선정을 베푼 인연으로 살기 좋고 아름다운 부산면 호계리와 장항마을 인근의 학두혈 명당터를 잡았고 퇴임 후 내려와 정착함으로써 청주김씨의 장흥 세거가 시작됐다. 김예의 손자 13세 김식(1356~?)은 태조 때 문과급제하고 벼슬은 형조판서에 올랐다.

◇좌찬성 김린 장흥 호계리 입향
김록의 손자인 13세 김린(1355~1428, 호는 동촌, 퇴은)은 함경도에서 나고 자라 문과급제하고 벼슬은 성균관전적, 홍문관교리, 양주목사, 도승지를 역임하고, 소인배의 모함으로 합천군수로 좌천됐다. 복권된 후 함경도관찰사를 거쳐 태종 때 호조판서, 의정부 좌찬성을 역임하고 다시 모함을 받아 장흥부사로 부임한 후 퇴임해 호계리 강가에 터전을 마련하고 ‘가정사’ 정각을 세워 학문하며 후학 양성으로 여생을 보냈으며 장흥 보본사에 배향됐다.

김린의 아들인 14세 김시생(?~?, 호는 회재)은 가학을 이어 장흥 종가를 계승했고, 동생 김보생(?~?)이 시강원 찬선을 지내고 강진에 입향했다. 김보생의 후손인 19세 김억추(1548~1618,시호는 현무공)와 동생 김응추, 김대복 등이 임진왜란의 공신록에 올라 강진 금강사(전라남도기념물 제91호)에 배향됐다. 김억추는 강진 금곡사에서 무술을 연마하고 무과에 급제해 임금의 평양 파천시 수군을 이끌고 대동강을 지켰으며, 정유재란에는 전라우도수군절도사로서 통제사 이순신장군과 함께 거북선을 개조하고 명량해전에 출전해 적장 마다시를 죽이는 등 승전의 주역으로 기록됐다.

◇향촌문화 거점이 된 동백정 보존
20세 김성장(1559~1592, 호는 운암)은 죽천 박광전의 문인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경명의병장의 의병창의에 참여해 금산전투에서 순절했다. 그는 김린이 지은 정각 ‘가정사’를 1584년 중건해 동백정(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69호)으로 개칭했다. 동백정은 방과 누마루, 툇마루 등 구조를 갖춰 선비 문사들이 시회를 열고 시문을 주고 받는 곳이었으며 장흥 인근의 후학들에게 강론하는 학당으로 기능했고 숙종 때부터는 대동계 집회소로 이용됐다. 320여년 동안 매년 정월대보름이면 ‘호계리 별신제’(전라남도 민속자료 제43호)를 지내는 명소로 알려졌다. 김성장의 아들인 21세 김기원(1593~1654, 호는 성재)도 병자호란에 안방준 의병군에 참여해 호남절의록에 올랐다. 29세 김익권(1832~1897, 호는 이재)은 효행으로 알려진 무장으로 용양위 부사과를 지냈으며 ‘이재유고’를 남겼다. 종가는 호계리에서 21대를 잇고 가훈 ‘덕산근성(德山根成, 덕을 산같이 쌓고 종가로서 뿌리를 이루라)’을 계승하고 있다. 가문이 보존한 이재유고, 동백정기운집, 만천시고, 장흥향약, 조위록, 문안계금안 등 고문서 기록물들은 가치를 인정받아 별신제와 함께 전라남도 민속자료 제43호로 지정됐다. 죽천 박광전의 시를 비롯한 문인들의 족적이 남아 있는 동백정, 김린을 배향한 보본사 등 가문의 전통을 간직한 유적 보존에 힘쓰고 있다.
/서정현 기자 sjh@namdonews.com
[동백정의 기문]
정자 이름을 동백이라 부른 것은 도대체 무슨 뜻인가? 사물에 가탁하여 은연중 뜻을 비추돼 별도로 취한 바가 있으니, 마치 서산의 고사리나 기수 물가의 대나무와 같은 것이리라. 가만히 들어보니 동촌 김린 선생은 걸출하고 특이한 자품으로 젊어서부터 뜻을 높이 세웠다. 단종이 왕위를 물려줄 때를 당해 일편단심을 올곧고 굳게 지켜 두마음을 품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간신들의 비방과 배척을 입어 후원 이상에서 외직인 장흥군수로 좌천되었다가 그대로 장전의 사동에 머물러 살면서 다시는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다. 이 정자를 짓고 동백나무를 심어 한 겨울에도 우뚝 솟은 뜻을 드높이니, 아! 이지러진 인간세상은 거품처럼 무상하건만 훌훌 털고 용기있게 물러나 덕을 높이 길렀도다. 나는 여기에서 그가 사물에 가탁한 뜻을 알았으니, 훗날 이 정자에 오르는 사람들도 그 지조를 상상할 수 있으리라. 그 후손 광택과 성장은 나를 좇아 공부한지 여러 해가 되었다. 하루는 정자의 기문을 청하기에 사양하였으나 받아주지 않아 간략하게 몇 줄의 글을 만들었다. 그 후손이 된 자는 여기에서 노닐고 여기에서 강학하면서 어찌 이름을 돌이켜 보고 의리를 생각하지 않을 것인가?
- 만력 계미년(1583년) 11월 상순에 왕자사부 박광전 씀.
<‘죽천집’ 중에서, 안동교 역주>

동백정 전경(전남 문화재자료 제169호). 청주김씨 집성촌 호계리 옆에는 탐진강 지류 부산천이 흐른다.
동백정. 김린이 은거하기 위해 건립한 가정사를 후손 김성장이 중건하며 울창한 동백림을 따라 동백정으로 개칭했다.
동백정 현판
동백정에 걸린 판액. 박광전의 글이다.
보본사
보본사 현판
보본사 추모재
종가 안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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