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콘텐츠 보물창고 광주·전남 종가 재발견

정승공 정응 후손 하동정 가문
청백리 정초·왕자사부 정수충
효열 행적 기리는 정려 하사
화담사·절효사·유물관 보존

하늘 감동시킨 충·효·학행 가문

절효사 3효열각

광주 북구 양산동에는 급속한 도시화에도 전통의 뿌리를 간직하고 있는 양지마을이 있다. 이 마을 절효사에서 선조의 훌륭한 충효학행을 기리며 정조의 필적이 담긴 고문서 등 유물을 송월당유물관에 보존한 하동정씨 문절공후 송월당공파 종가를 찾아 가문의 내력을 살펴 본다.

◇두문동 절의 충신 정희 후손
광주 북구에 세거하는 하동정씨는 고려 도첨의좌정승을 지낸 정응을 시조로 모신다. 정응(1216~1273)은 송-원 교체기 목숨 걸고 외교를 펼친 충신으로, 고려 고종 때 과거급제하고 여몽 30년전쟁 중 원나라·송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와 친교는 물론 군사 정보에도 공을 세워 좌정승에 올랐다. 그 손자인 3세 정계는 평장사를 역임하고 하천군(河川君)에 책봉됐다. 6세 정희(호는 묵은)는 포은 정몽주의 제자로 1376년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사헌부집의를 역임할 때 임금이 후회할 일을 경계하는 탄핵상소로써 정도전, 남은, 조준 등을 유배케 했으나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순절한 후 유배돼 신분이 서인으로 강등됐다. 조선 태종이 귀양을 풀고 출사를 권유했으나 대구 동촌에 은거해 끝내 절의를 지켜 승국명류표방록에 9정신으로 기록되고 광주 화담사, 화순 예산사, 장성 경현사, 두문동서원에 배향됐다.

◇농사법·천문역법 공헌한 정초
7세 정초(?~1434, 시호는 문경)는 문과 급제하고 벼슬은 세종 때 함길도관찰사, 이조·공조 판서, 예문관·집현전 대제학을 지냈다. 그는 공조판서 겸 총제를 맡아 팔도 농사 경험과 기술을 종합한 ‘농사직설’을 찬했고, 새 역법(曆法)을 만들고, 회례문무악장을 편찬했으며, 박연과 함께 용비어천가 등 악장을 제작했다. 세종의 명으로 흠경각에 천문관측대인 대소간의대를 설치하고 궁중의 자동 물시계 ‘금루’, 측우기, 혼천의 등의 제작을 총괄했으며, 삼강행실도를 편찬했다. 그는 청백리에 녹선됐고 문경공 시호를 받아 광주 화담사에서 추모한다.

8세 정수충(1401~1469, 시호는 문절)은 문과 급제했고 세종의 신임으로 왕자사부(영응대군)를 맡았으며, 벼슬은 사예, 전농주부, 서학교수, 성균사예를 거치고, 세조가 즉위하여 내린 좌익공신 녹권을 사양했다. 이후 집현전 성균사예, 강설관, 훈련원제조를 역임하며 청렴과 정의로써 임했던 공적을 기록한 철권을 하사받았고 하원군에 군봉됐다. 대사성, 의정부 좌찬성에 올랐고 국정을 자문하는 봉조하로서 문절공 시호를 받았다. 대구 청백서원, 광주 화담사 등에서 추모한다. 11세 정형은 눌제 박상의 제자로서 사헌부감찰을 지냈고, 그의 아들 정유명(호는 덕암)은 광주 오치동에 터잡아 입향했다. 13세 정적(호는 효우재)은 효행과 독실한 우애로 가문을 빛냈다. 그의 큰형 정강이 임진왜란 때 충의위로서 순국하고 형수는 순절하자, 이를 복수하려고 전투에 나선 둘째형 정진이 왜적에게 붙잡혔다. 포로가 됐다는 소식을 듣고 구출에 나서서 왜국까지 추적해 9년간을 찾았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국했다. 나라에서는 ‘효우재’라 가옥 명칭과 함께 포상을 내렸다.

◇효행·인의仁義 행적 유물 보존
16세 정오도(1647~1736, 호는 약포)는 성리학자로서 지극한 효행이 하늘에 닿아 뜰에 약초가 저절로 자라고 그 탕약으로 어머니의 병을 낳게 한 일화가 알려져 스승 송시열이 ‘동리약포’를 써 주었고 약포로 당호로 부르게 됐다. 인현왕후 폐출사건에 목숨 걸고 만언소를 올렸으며, 이기론에 관해 송시열과 주고받은 서신 등 저술이 ‘약포선생문집’에 전한다. 19세 정윤길(1723~1804, 호는 송월당)은 진사시에 합격하고 어정책교정을 역임했다. 정조의 명으로 이용후생을 위한 ‘농서’를 제작했다. 그의 효행과 더불어 성실한 노비에게 양인으로 살도록 집과 전답을 마련해 주었던 인의(仁義)를 행한 미담이 알려져 나라에서 효자정려를 내리고 사헌부지평에 증직했다. 22세 정재요(1838~1879, 호는 은월)는 지극한 효성으로 부모를 간병하며 3년상을 치른 효자로 알려졌고, 금강산·지리산 답사기 ‘설금일기’를 은월집에 남겼다. 그의 부인 밀성박씨 역시 위독한 부군에게 손가락을 으깨 흐르는 피를 주혈 하는 등 지극한 정성의 여중군자로 알려져 열부의 정려가 내려졌다.(부처쌍효열 정려) 2014년 도로명 개편에 따라 송월로(광주 북구 문흥동~오치동)가 고시되고, 후손들은 유물관을 세워 선조가 남긴 문집 등 유물을 보존하고 절효사를 가꾸며 정신 계승에 힘쓰고 있다.
/서정현 기자 sjh@namdonews.com
 

화담사 전경.(광주광역시 기념물 제18호) 화담사는 정희 등 다섯 현인을 추모하는 사우로서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불구하고 향사하며 건물을 지켜냈다. 사당·동재·서재의 기능을 하는 전형적인 서원 건축양식을 보존하고 있다. 고경당(강당), 열호재, 양양문(내삼문), 사당, 청지재, 팔덕문(외삼문)이 있다.
화담사 사당. 1735년 건립된 사우로서 묵은공 정희를 주벽으로 정초, 정수충, 정오도, 민제장(충장공) 등 5인의 위패를 봉안해 화담사보존회가 봉향을 주관한다.
옛 정려각. 정재요와 부인 박씨의 효열을 기려 나라에서 내린 정려다.
위인재. 문절공 정수충은 잠언을 통해 ‘爲仁不富 爲富不仁 富之一字 吾所不慾 汝曹其識之’(위인불부 위부불인 부지일자 오소불욕 여조기식지, 어진 일을 하자면 부자가 될 수 없고, 부를 이룩하려면 仁이 될 수 없으니 富 한 글자는 내가 바라지 않는 바라 너희들은 그렇게 알고 인을 실천하기에 힘쓰라)라는 유훈을 남겼다.후손들은 ‘위인재’를 짓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힘쓰고 있다.
종택 외삼문
작지석. 정재요가 투병으로 위독해 지자 박씨부인이 손가락을 으깨 흐르는 피를 주혈했다는 돌을 작지석이라 부르며 부인의 열행을 기리는 정려 옆에 보존하고 있다.
정조가 채점한 정윤길 과거 시험답안지. 1798년 광주별시에서 정조에게 채점받은 정윤길의 답안지로서 책문은 3중 부문은 3하를 받았다.(붉은 글씨가 임금의 채점)
정윤길이 제출하고 정조가 채점한 광주별시 책문 답안지. 채점 결과 3중등급을 받았다.
송월당유물관 현판
송사 기우만이 지은 절효사 3효열정려 기문
정오도가 지은 약포집
송월당유물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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