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콘텐츠 보물창고 광주·전남 종가 재발견

고구려 명장 강이식 시조
강희맹·강학손 이은 학덕
진주성 순절 충의정신 빛나
재실에 학당 열어 정신계승

대문장가·명필·유명화가 배출

이흥서원 모현당. 강석덕, 강희안, 강희맹, 강귀손, 강학손 등 다섯 선생을 추모하는 서원으로 영광읍에 있다. / 영광군 사진제공

전남 무안 해제면 바닷가에 진주강씨가 세거하는 산길마을이 있다. 수나라 대군을 격파한 고구려 장군의 후손인 진주강문이 대륙의 끝단인 서남해바다 해안에 안거한 사연은 파란만장하다. 고려 명족이었으며 조선 전기 대문장가와 명필 화가를 배출하고 진주성 순절 충신과 효자 열부의 본보기를 보인 충효열 명신의 가통을 잇고 있는 무안 진주강씨(晉州姜氏) 사과공파 오제 종가를 찾아 가문의 내력을 살펴본다.

◇ 국자박사 강계용 박사공파 열어
진주강씨는 고구려 병마원수 강이식을 시조로 모신다. 그는 수나라 문제의 30만 대군을 요서지방 임유관 전투에서 섬멸하는 대승을 거두고, 군자 및 기기를 노획함으로써 요동 방어전선 구축에 큰 공을 세운 명장이다. 그의 후손 강계용은 고려 원종 때 문과급제하고 국자박사를 지냈고 서장관으로 일본을 다녀 온 후 진산부원군에 책봉됐다. 그가 진주강씨 박사공파를 열었다.

4세 강창귀(?~1480)는 음사로 계림·영천 판관을 역임했다. 5세 강군보(?~1380)는 정당문학을 거쳐 예문관대제학·상의문하찬성사를 역임했다. 7세 강회백(1357~1402, 호는 통정)은 명필 문장가로서 권근에게 성리학을 배우고 문과 급제해 이조판서·정당문학 겸 대제학을 역임했고 추충협보공신에 올랐다. 정몽주와 함께 정도전 탄핵에 동의했으며 선죽교피습사건 이후 진양(진주)에 유배됐다. 훗날 조선 태조의 인재등용에 따라 동북면 도순문사를 역임했다. 당대 명필로써 초서 간찰 글씨와 통정집을 남겼다.

◇ 한글 창제 참여, 실록·대전 편찬한 형제
8세 강석덕(1395~1460, 호는 완역재)은 시문 서화에 능한 청백리로서, 음사로 벼슬에 나가 좌승지를 거쳐 대사헌·지돈녕부사를 역임했으며, 원종공신에 녹훈되고 완역재집을 남겼다. 그의 아들인 9세 강희안(1418~1465)은 세종 때 문과급제해 집현전직제학·황해도관찰사·중추원부사를 역임했다. 두 번이나 명나라에 사은부사로 다녀왔으며, 좌익원종공신에 책록됐다. 그는 훈민정음 해석, ‘운회’의 언문 번역에 참여했고, 용비어천가 주석, 동국정운 편찬, 조선팔도 지도제작 등의 업적을 남겼다. 고사관수도·산수도 등은 15세기 사대부 화풍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9세 강희맹(1424~1483, 호는 사숙재, 시호는 문량)은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한 후, 어제구현재시·발영시·등준시 등 세 번이나 등과한 당대 문장가다. 벼슬은 예조 형조 병조 이조의 판서를 지내고 좌찬성에 올랐다. 진헌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세조실록·예종실록, 신찬국조보감·경국대전, 동문선·동국여지승람 등을 편찬했다. 그는 원종공신·익대공신으로 겹공신이 됐고 진산군에 책봉됐으며 사숙재집을 남겼다.

◇ 낙향해 향촌 인재양성, 가학 전통 이어
10세 강학손(1455~1523, 호는 팔용정, 사평)은 점필재 김종직의 문하에서 학문해 문과급제하고, 사헌부감찰·장례원사평·평양판관·한성부서윤을 역임하고, 무오사화에 영광에 유배됐다. 중종반정에도 출사하지 않았고 팔용정을 짓고 후학양성에 전념하며 사평방죽을 쌓고 다리를 놓는 등 백성을 위해 덕행을 폈다. 11세 강영수(1471~1513, 호는 묵은)는 알려진 효자로서 충의위장군 행충좌위 사과를 지내고 아버지와 함께 남하해 영광에서 진주강씨 사과공파를 열었다. 그의 외손자가 고봉 기대승이다.

13세 강극의(1520~1573, 호는 오제)는 가학을 잇고 용양위부사과를 지냈으며 행주기씨부인과 혼인하고 오제종가를 열었다. 15세 강안국(1542~?)은 무안 해제에 입향했고 그 동생 강창국(?~1592, 호는 삼봉)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들 강대한과 함께 금산전투에서 싸우다 순절해 선무원종공신에 녹훈됐다. 16세 강흘(1571~?, 호는 의헌)은 임진왜란 때 김천일장군 막하에 의병 출전해 진주성전투에서 장군을 따라 투신 순절했으며 선무원종공신으로 단서철권을 하사받았다. 종가조로부터 17세를 잇고 있는 종가는 선조들의 애민정신이 서린 경의재·영언재·이흥서원·팔룡정 등 유산을 보존하며 학당을 여는 등 학덕과 정신 계승에 힘쓰고 있다. /서정현 기자 sjh@namdonews.com

종택
경의재. 종가 제실로서 근대까지 마을 학당으로도 사용됐다.
경의재 현판
영언재
진주강씨세장산표지석
산길마을 팽나무 (보호수 수령 25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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