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콘텐츠 보물창고 광주·전남 종가 재발견

신라 사공 이한을 시조로 모셔
비운 왕자 성녕대군 계대 이어
향헌56조 지은 효령대군 계승
재실 중건 추진 향촌 발전 힘써

비운 딛고 향촌에 은거한 왕손 가문

구강재

전남 화순 한천의 천운산 자락에는 권력을 멀리하고 은거해 대대로 학덕과 충효정신을 잇고 있는 왕손들의 세거지, 신촌마을이 있다. 덕망 높은 대표 종친인 효령대군의 후손이면서 비운의 왕자 성녕대군의 대를 잇고 있는 화순 전주이씨(全州李氏) 성녕대군파 기성수후 복강종가를 찾아 가문의 내력을 살펴 본다.

◇태종 왕권강화로 세종 치세 열어
전주이씨는 신라 사공을 지낸 이한을 시조로 모신다. 3세 이천상은 복야를 지냈고 6세 이긍휴 대에서 고려에 벼슬하기 시작하며 7세 이염순부터 11세 이충민까지 전라조 전주(全州)에서 호장을 지냈다. 12세 이화는 중앙정부의 추밀을 지냈고, 16세 이린이 내시집주를 지내고 무신정권기에 득세하다 화를 입어 그 후손이 전주로 낙향한다. 18세 이안사는 몽고침입 때 가솔을 이끌고 전주에서 삼척으로, 다시 함경도로 이주해 3대에 걸쳐 서북, 동북 일대의 변방과 여진족까지를 관할하는 세력가문으로 성장시킨다. 21세 이자춘은 공민왕의 원나라 쌍성총관부 공격에 참여해 영토 회복에 공을 세우고 천우위상장군으로 왜구를 방어한 공적을 쌓았으며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로 일하다 순직했다.

사병조직 기반을 갖춘 탄탄한 가세를 이어 받은 22세 이성계(1335~1408, 태조)는 침략군 20만명으로 개경을 함락시킨 홍건적을 물리치고 삼남의 왜구를 격퇴한 명장으로 추앙받았다. 그는 최영의 요동정벌군을 이끌고 출병해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정도전 등 신진사대부 개혁세력의 추대로 새 왕조를 건설했다. 23세 이방원(1367~1422, 태종)은 과거급제한 문무겸장으로 부친의 조선 건국을 도왔고 제3대 국왕에 즉위했다. 학식과 도량의 카리스마로 정치 질서를 확립하고 왕권을 강화함으로써 세종 치세에 필요한 안정 기반을 조성했다.

◇대군 양자된 안평대군·원천군
24세 이보(1396~1486, 효령대군, 시호는 정효)는 학문과 덕성을 이룩한 명필로써 효성이 지극한 태종의 아들이자 세종의 형으로 아홉 조정을 섬기며 조선 초기 왕권 안정에 실천적으로 기여한 왕실 종친으로 존경받았다. 숭유억불 정책에도 불교를 보호해 보신각 대종(보물 제2호)과 원각사 10층 석탑(국보 제2호)를 제작하고 법화경 금강경 등 불경의 번역 교정에 힘썼다. 그는 향촌 자치규약인 향헌 56조를 지어 백성의 윤리 함양과 주민자치 기초를 마련하는 업적을 남겼다. 서초구 청권사(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2호)에서 추모한다.

이종(1404~1418, 성녕대군)은 총명한 지혜로 효성과 우애의 천성을 지녔으며 용모가 공손해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총애를 받았다. 양녕·효령·충녕대군(세종대왕)의 동생인 그는 14세에 홍역으로 사망한 비운의 왕자다. 좌찬성 성억의 딸 창녕성씨와 결혼했으나 아들을 두지 못하고 요절해 형 세종의 아들 이용(안평대군)으로 뒤를 잇게 했다. 이종이 성녕대군파의 파조가 된다.

25세 이용(1418~1453, 안평대군)은 문종과 세조의 동생으로 시문 그림이 뛰어나고 명황제가 감탄해 사신들이 글씨를 받으려 간청할 정도의 명필로 알려졌다. 호탕한 덕성으로 사대부 관료들과 폭넓게 교유했다. 김종서 등 고명대신, 종친 문사의 수양대군 등 정치세력과 삼각구도를 이루다 김종서 등이 안평대군을 왕위에 올리려 한다는 무고로 시작된 계유정난의 명분이 돼 강화도로 유배됐다가 사사되는 화를 입었다. 몽유도원도 발문과 소원화개첩(국보 제238호)을 남겼다. 그의 아들들도 화를 피하지 못해 절손된다. 이로 인해 효령대군의 여섯째 아들인 원천군 이의로 하여금 후사를 잇게 했다.

◇기성수 후손 충효·학덕 계승
성녕대군 2세인 이의(1433~1476, 원천군)는 효령대군의 6남으로 태어나 성녕대군에게 양자가 됐으며 세종 때 중의대부 원천윤에 책봉되고 세조 때 원천군 작위를 받았으나 투병으로 병사했다. 그는 열산정 이해, 기성수 이정, 가은군 이분 등 세 아들을 두었다. 기성수 이정의 증손자인 6세 이복강(병사공)은 병마절도사를 지내고 복강종가를 열었다. 보성 구강재에서 추모한다. 그의 아들 이원구는 경기도에서 전남 담양읍 향백동(현재의 양각리)으로 이거해 이후헌(보성 문덕), 이후은(순천 송광), 이후철(서면), 이후구(송광면) 등 아들 4형제를 뒀다.

8세 이후헌의 증손 11세 이만관은 화순 한천면 반곡리에 입향해 가문이 세거할 새터로서 신촌마을을 조성했다. 17세 이동석(1907~1970) 재야 한학자로 서당을 열고 후학양성에 전념했다. 종가는 이강근 12대 종손을 중심으로 선조의 정신을 계승할 공간으로 재실 중건에 힘쓰며 충효와 학덕 실천에 앞장서고 있다. /서정현 기자 sjh@namdonews.com

종택 안채
구강재 전경
전주이씨 세장비
구강재 현판
가훈. ‘가전충효 세수인경’은 세종이 내린 글씨로써 원본은 없지만 이를 실천하기에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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