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콘텐츠 보물창고 광주·전남 종가 재발견

8대 이은 평장사 배출한 명문
호남 사림 학문사상 교류 거점
의병장 형제 정신 계승한 마을
대대로 계승할 생가복원 추진

형제의 효성·충성 영원히 잊지말라
무등산 자락 광주 북구에는 만백성이 백세토록 길이 기억하게 하고자 정조대왕이 마을 이름을 내린 충효마을이 있다. 마을 앞 왕버들과 정려가 말해 주듯 민족 고유의 정신문화을 간직한 전통마을 충효리 인근에는 환벽당, 소쇄원, 식영정, 취가정 등 명승 유적이 즐비하다. 이 마을에서 비운의 명장과 효자 형제 일가의 충효정신을 계승하며 세대를 잇고 세거하는 광산김씨 낭장공파 풍암공 종가를 찾아 가문의 내력을 살펴본다.

풍암정
풍암정
풍암정 전경
풍암정 전경

◇신라 왕자 김흥광 시조
광산김씨는 도시조 김알지의 후손으로 신라 45대 신무왕의 셋째아들인 김흥광을 시조로 모신다. 그는 신라 국세가 기울자 무진주 서일동(현 전남 담양 대전면 평장리)에 은거했으며 광산부원군에 봉해졌다. 이로말미암아 광주의 옛이름 무진주의 광산을 본관으로 한 김씨가 세대를 잇고 있다. 3세 김길이 고려 개국공신으로 삼중대광에 오르면서 김준(상서도성좌복야), 김책(평장사), 김정준(내사시랑평장사) 등 8대에 걸쳐 평장사를 배출해 명문가 기반을 다졌다.

7세 김양감은 이자연의 제자로서 문과 급제하고 벼슬은 서북로병마사를 거쳐 좌복야 문화시랑평장사, 수태위에 올랐다. 그의 아들 김약온은 문과 급제해 문하시중을 지냈다. 동생인 8세 김의원(1071~1148)은 음서로 벼슬에 나가 예종 때 윤관 휘하 판관으로 웅주성전투, 길주성 수성에서 공을 세운 여진 정벌의 명장이다. 이자겸의 난에 연루됐으나 복권돼 공부상서 서북대도호부사에 올랐다.

◇호남사림 시대의식 거점 환벽당
9세 김광중(?~1170)은 과거 급제하고 서북면병마부사로 압록강변에 이주한 금나라 사람들의 움막을 불태우고 둔전을 설치한 일이 화근이 돼 금나라 황제의 처벌 요구 당사자가 됐으나 상서우승에 올랐는데 무신정변 때 무신들에게 화를 입었다. 그의 아들 10세 김체가 안동부 순안현령으로 있을 때 아버지를 죽음에 이르게 한 박광승에게 복수했다고 전한다.

14세 김규는 낭장을 지내고 낭장공파를 열었고 그의 아들 김인원은 낭서를 역임했다. 전교서령을 지낸 김빈의 아들 20세 김한노는 대제학, 예조판서를 역임한 양녕대군의 장인으로 광산군에 봉해졌다. 그는 양녕대군의 행실 책임을 문책하는 태종에 의해 충청도에 유배됐다. 24세 김무는 감무를 지내고 광주 금호리에 입향했다. 27세 김문손이 충효마을로 이거했다. 그의 손자인 김윤제(1501~1572, 호는 사촌)는 문과급제해 홍문관교리, 춘추관편수관, 전주진영병마절도사, 부안군수, 나주목사를 거치고 낙향했다. 그는 나주목사시절 기대승이 엮은 주자문록을 간행했으며 임억령·양산보·유희춘·김인후·기대승·소세양 등 호남선비들과 교유하며 기묘사화 시기 호남사림의 시대의식을 함께 했고 환벽당(명승 제107호)에서 후학양성에 전념해 정철, 김성원, 김덕령 등 역사인물들을 배출했다.

◇충신·효자 기려 마을명 지정
31세 김덕홍(1558~1592)은 동생과 함께 성혼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경명 의병군의 금산전투에서 순절했다. 김덕령(1568~1596, 시호는 충장)은 종조부 김윤제와 우계 성혼의 제자로 문무를 겸전한 명장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고경명 막하에서 전주로 진군 중 모친 봉양을 당부하는 형의 권유로 귀향했으나 모친상 중에 담양 의병을 일으켜 이인경 부대에 합세했다 해 선조로부터 형조좌랑·충용장군·초승장군, 광해군으로부터 익호장군 군호를 받았다. 권율장군 휘하에 들어가 곽재우 의병군과 함께 고성을 방어하고 부산 동래에 진출하는 공을 세웠고 여수 이순신 수군과 함께 장문포의 수륙연합전에 대승을 거뒀다. 거제 공격의 선봉장으로 활약했고 정암을 기습하는 왜병을 전멸시켰다. 이몽학의 반란 토벌 명령을 받고 운봉으로 진군하던 중 평정됐다는 소식을 듣고 복귀했으나 이시언·김경서 등의 모함으로 수감돼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춘산곡’을 남긴 후 옥사해 했다. 정조는 그에게 충장 시호를, 형제들에게도 포장 증직을 내리고 형제와 이씨부인의 충효 쌍전을 영원히 잊지 않도록 마을에 ‘충효지리忠孝之里’ 비석을 세우게 했다. 동생 김덕보(1571~1627, 호는 풍암)는 형들과 함께 의병군에서 활약했으나 김덕령이 옥사하자 은거해 학문연구에 전념했다. 그가 풍암공종가를 열어 14세를 잇고 있다. 충효동과 무등산을 비롯한 광주 일원에는 비운의 명장 김덕령과 관련된 수많은 설화가 지명·유적·유물과 연결시켜 전승되고 있다. 종가는 충장사, 풍암정, 충효리정려비각(광주 기념물 제4호) 등 유산들을 보존하며 정신계승을 위해 특히 김덕령 생가터를 복원함으로써 충효리 일원 종가 유적의 거점을 마련하는데 힘쓰고 있다.
/서정현 기자 sjh@namdonews.com

풍암정 현판. 풍암정사로 쓰였다.
풍암정 현판. 풍암정사로 쓰였다.
충효동정려비각
충효동정려비각
부조묘. 김덕령과 부인 흥양이씨를 추모하는 사당이다.
부조묘. 김덕령과 부인 흥양이씨를 추모하는 사당이다.
충효리 왕버들
충효리 왕버들
풍암정 옆 시검바위. 김덕령 장군이 검을 만들었다는 무등산 중턱의 주검동유적과 연결해 검을 시험했던 바위라고 전해지고 있다. 두 바위가 마치 칼로 벤듯한 쪼개진 모양을 하고 있어 관람객의 흥미를 유발하고 있다.
풍암정 옆 시검바위. 김덕령 장군이 검을 만들었다는 무등산 중턱의 주검동유적과 연결해 검을 시험했던 바위라고 전해지고 있다. 두 바위가 마치 칼로 벤듯한 쪼개진 모양을 하고 있어 관람객의 흥미를 유발하고 있다.
풍암정 판액. 고경명 의병장의 시가 쓰여 있다.
풍암정 판액. 고경명 의병장의 시가 쓰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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