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콘텐츠 보물창고 광주·전남 종가 재발견
고려 충신 노목·노신 후예
임란공신 노홍·금계 노인 배출
절의 지킨 가통 이어 일기 기록
기록자료 1천여점 전승·보존 힘써

종가 안채 ‘장춘오헌’. 무안군 향토문화유산 제20호.

한·중·일에 빛나는 ‘절의정신’

국토 서남단 전남 무안 해제의 봉대산 자락에는 풍수지리에서 하늘의 옥녀가 비파를 타는 형국이라는 옥녀탄금 명당에 자리한 슬산마을이 있다. 한 때 군비 저장고가 있었던 이 마을에 장춘오헌을 짓고 때론 북벌을 상소하고 때론 서당을 열어 계몽에 앞장서 온 가문이 있다. 노인의 금계일기를 비롯, 가문 인물들의 기록들은 보배롭다. 400여년 전 슬산마을에 터잡아 수많은 족적과 기록을 남긴 무안 함평노씨(咸平魯氏) 한림공파 슬산 종가를 찾아 가문의 내력을 살펴본다.

◇고려 문하시중 노목 시조
중국 주나라 ‘백리’가 식읍으로 노나라 땅을 받아 노(魯)씨성이 시작됐다. 그의 후손 노중연이 한반도 노씨를 열었다. 함평노씨는 고려 문하시중 노목(시호는 문충)을 시조로 모신다. 그는 노중연의 44세손으로 고려 인종 때 이자겸을 축출하는데 공을 세워 문하시중에 오르고 가수군(경남 합천 지역)에 봉해졌다가 함풍군이 된 공신이다. 이로 인해 함평(함풍과 모평 합명)을 관향으로 하는 노씨가 번성했다. 4세 노관도는 수문전 태학사를 지내고 문하시랑평장사에 올랐다. 7세 노신(1336~?, 호는 악은, 시호는 무열)은 상장군, 문하시중에 오른 고려 충신이다. 그는 공민왕 때 홍건적을 격퇴하고, 김용의 난에 개성을 수복한 공으로 함풍군에 봉해졌다. 그는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 은거했다가 전라도 함평에 낙향했으며 고려통일대전에 배향됐다.

노신의 아들 노성안(현감공파), 노의안(진사공파), 노유안(한림공파) 3형제가 각각 분파해 나주, 무안, 함평 일원에 세거했다. 노유안의 후손인 16세 노홍(1561~1619, 호는 관암, 시호는 충열)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황진, 위대기와 함께 금산 이치전투에서 대승을 거뒀다. 이순신장군 휘하의 부정(副正)으로 활약해 선무원종이등공신에 녹훈됐다. 벼슬은 남도포만호, 임치진첨사, 훈련부정을 역임했다. 1604년 당포 앞바다에 출몰한 왜의 무장선단을 나포해 승전고를 울리고 선조로부터 ‘당포전양승첩지도’(전남유형문화재 제25호)를 하사받았다. 그는 도원수 강홍립과 함께 명·후금 전쟁에 파병됐다가 1619년 만주의 부차전투에서 순국해 순충적덕보작공신에 올랐다. 나주 거평사에서 추모한다.

◇동아시아에 빛나는 노인의 일기
16세 노인(1566~1622, 호는 금계)은 참봉 나항에게 학문을 배워 진사시에 합격하고 율곡 이이의 문인이 됐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권율 장군 휘하에서 이치, 행주, 의령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정유재란에는 함락된 남원성의 적세를 살피다 포위돼 총을 맞고 포로로 일본에 끌려갔으며 기개와 충절로 일관하며 적정의 허실을 간파했다. 억류 3년만에 명나라 사신의 도움으로 탈출해 중국 복건성의 무이서원(주자가 세운 서원)에서 학사들에게 정주학을 강해하고 해동공자라는 칭송과 함께 전별시집 ‘황명유운’과 명종록을 받았다. 명황제 신종에게 ‘복수책’을 올리자 신종은 문천상(송대 충신), 소무의 절개에 비유하고 말을 하사하며 귀국시켰다. 그는 무과에 급제해 수원부사, 황해수사를 지내고 낙향했다. 그도 ‘당포승첩도’에 참전한 28장수에 올랐다. 당대 일본·중국의 풍물을 ‘금계일기’(보물 제311호)에 담았고, 피부동고록·왜국지도 등을 금계집에 남기고 거평사, 광주 무광사에 배향됐다.

당포앞바다승전도.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25호 / 국가문화유산포털 이미지 제공
당포앞바다승전도.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25호 / 국가문화유산포털 이미지 제공

◇의로운 행적 기록해 계승 힘써
17세 노덕원(1564~1636, 호는 무민당)은 중봉 조헌의 문인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 창의해 금산에 이르렀는데 이미 패한 상황이라 의병을 이끌고 이순신 휘하에 들어가 한산과 노량해전에서 활약해 승전에 기여했다. 그는 1627년 추천으로 이조좌랑을 지냈으며 그가 무안 해제에 입향했다. 18세 노유성(호는 서은)은 중립찰방을 역임했고 병자호란에 의병창의했으며, 효종에게 북벌을 상소하며 군량 100석을 바쳤다. 26세 노일상(1842~?)은 조선후기 연재 송병선의 문인으로 사례요람·채기신편·송록정요를 남긴 향촌 한학자로서 학산사에 배향됐다.

27세 노병희(1850~1918, 호는 호정)는 학덕으로 태의원 전의를 제수받아 영친왕을 진료한 의관이다. 그는 한말의병으로 활약하며 곡성전투에 참전했다. 그는 대마도에 끌려가 단식으로 사망한 스승 최익현의 곁을 지켰다. 청일전쟁 때 고종과의 대화를 담은 입시일기, 대마도의 기록을 담은 대마도일기를 ‘호정유고’에 남겼다. 후손들은 종가 서당에서 독서회를 여는 등 문맹퇴치 브나로드운동에 앞장섰다고 한다. 종택 장춘오헌(무안군 향토문화유산 제20호)을 보존하고 거평사와 학산사(무안군 향토문화유산 제8호)를 중수했다. 황명유운·호정유고 등 임란 이후 기록자료 1천여점 등 유산을 보존하며 정신계승에 힘쓰고 있다. /서정현 기자 sjh@namdonews.com

노인 영정. 광주 학동 조대병원 앞 언덕에 있는 무광사에서 보존하고 있는 노인의 영정이다. 무광사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주벽으로 충장공 김덕령 장군, 문열공 김천일 의병장, 금계 노인 선생, 수은 강항 선생, 충장공 정운 장군, 수사 송희립 장군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참교육자·사회사업가인 춘담 최병채 선생이 건립한 사우다./ 슬산 종가 노기욱씨 사진제공
종가 서당
장춘오헌 현판.
장춘오헌 전경
금계일기. 보물 제311호 / 슬산 종가 사진제공
학산사 사당. 무안군 향토문화유산 제8호
학산사 정절당
거평사 경의재
거평사 사당. 악은사로 건립돼 금계사로 개칭했다가 대원군 때 훼철된 후 1966년 중수해 악은 노신과 금계 노인, 관암 노홍 세분을 추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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