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콘텐츠 보물창고 광주·전남 종가 재발견
두문동72현 임탁 은거 낙향
기묘사화 탄원한 임붕 후손
폐습 타파·국난 대비 앞장
무안 식영정 유적보존 힘써

절경에 은거…도학<道學> 꽃피운 가문

식영정(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37호)

남도 350리 영산강의 아름다운 8경 중 제2경은 ‘몽탄노적’이다. 은빛 비단처럼 느리게 흐르는 맑은 강물 위로 물새들이 떼지어 날아 앉는 풍광이 드넓은 갈대밭위에 펼쳐진 곳이다. 솔개 날고 물고기 뛰노는(연비어약鳶飛魚躍) 조화로운 자연의 도(道)를 저절로 느낄 수 있는 절경지로 알려져 있다. 견훤군에 몰려 사면초가에 처한 왕건이 꿈속에 나타난 현인의 계시로 강을 건너 구사일생했다는 설화로부터 유래한 지명이 몽탄(꿈여울)이다. 무안군 몽탄면 이산리 배뫼마을에서 400여년을 세거하며 도학 정신을 계승해 온 무안 나주임씨(羅州林氏) 정자공파 종가를 찾아 가문의 내력을 살펴본다.

◇고려 대장군 임비 원조
나주임씨는 고려 대장군 임비를 원조로 모신다. 그는 격변기에 원나라 제국공주와 혼인하는 충렬왕을 호위한 공신이다. 9세 임탁은 해남감무를 지내다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 들었다가 나주 회진에 은거했고 고려통일대전에 배향됐다. 14세 임평(1462~1522)은 무과 급제하고 벼슬은 전라도병마우후를 역임했고 중종반정에 참여한 정국원종공신이다. 그의 아들인 15세 임붕(1486~1553, 호는 귀래당)은 기묘사화에 조광조의 억울함을 상소한 태학생의 소두(대표)로서 과거시험관 앞에서 붓을 던지고 낙향해 유생들과 함께 ‘금강11인계’를 결사했다. 2년 후 문과 급제하고 예조·호조참의, 좌승지, 전라·충청병사, 광주목사를 역임했다. 16세 임복(1521~1576, 호는 풍암)은 뛰어난 학행으로 문과급제해 승문원정자를 역임하고 양재역벽서사건에 연루돼 유배됐다가 복권 후 낙향해 정자공파를 열었다. 기록화인 광주 희경루방회도(보물 제1879호) 속 세번째 인물이다. 그는 1574년 국방정책 ‘변사십여조’을 상소해 임금이 받아들였고 창이 달린 배(철갑선)에 관해서는 비변사와 각도 수사에 그 설계에 따라 제작하게 한 것이 훗날 거북선으로 개조된다. 17세 임서(1570~1624, 호는 석촌)는 문과급제해 벼슬은 승문원정자, 승지, 공조참의를 역임하고 사직했다. 그는 광해군 때 이언적·이황에 대한 문묘종사 논쟁, 인목대비 폐모론 등에 관련돼 파직과 사직을 거듭했다. 인조반정 후 안동부사 , 황해도관찰사를 역임하며 권농·군사 조련에 힘썼고, 석촌유고를 남겼다.

◇몽탄 입향한 임련 식영정 건립
18세 임련(1589~1648)은 문과 급제해 지평, 장령, 사간, 집의를 거쳐 우승지를 역임했다. 외직으로 영암군수, 진주·원주목사, 남원부사 등을 역임하고 낙향해 영산강 절경지인 몽탄 배뫼마을에 터잡아 이거했다. 식영정을 짓고 명사들과 교유했고 병자호란에는 의병창의해 남한산성에서 임금을 호종했다. 그의 동생인 임담(1596~1652, 호는 청구, 시호 충익)은 문과급제해 대사간, 도승지, 이조판서를 역임했다. 경상도관찰사로서 ‘서원의 사당화’ 폐습을 시정토록 상소했다. 병자호란 후 수습을 위해 연경을 세 차례 다녀오고, 청나라 칙사 접빈을 전담했다. 1652년 반송사로 다녀오다 사망해 왕명에 따라 국장(85일간 장례)으로 예우 받았다. 19세 임종유(1615~1659)는 어모장군, 행세자익위사부수를 지냈고, 그의 아들 4형제가 가문의 학덕을 이었다. 임세온(1641~1711)과 임세량(1651~1709)은 생원시에 합격했고, 임세공(1653~1703)은 진사시에 합격했으며, 넷째 임세검(1657~1709)은 문과급제해 현감, 사간원사간을 지냈다.

◇빛나는 가통, 학덕으로 계승
21세 임상덕(1683~1719, 호는 노촌)은 가학을 이어 문과에 장원급제했다. 벼슬은 문학, 남평현감, 이조정랑, 홍문관교리, 능주목사를 거쳐 대사간에 올랐다. 역사서 ‘동사회강’과 문집 노촌집을 남겼다. 23세 임시철(1740~1805, 시호는 간헌)은 문과급제해 대사간, 대사헌, 강화부유수를 역임하고 청나라에 두번 다녀왔으며, 공조판서, 도제조, 대호군에 올랐다. 임석철(1733~1787)은 문과급제해 예문관검열, 호조참의, 승지를 거쳐 대사간에 올랐다. 그의 아들인 24세 임경진(1767~1842)은 문과급제하고 이조·호조참판에 올랐다. 25세 임영수(1790~1879, 시호는 효정)는 문과급제해 대사간, 승지를 거쳐 대사헌, 한성부판윤, 공조·예조판서를 역임했다. 임한수(1817~1886, 호는 송석)는 문과급제해 정언, 교리, 종부시정을 거쳐 양주목사, 대사간, 이조참판을 역임하고 사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와 의주부윤, 강원도·함경도관찰사를 역임했다. 종가는 식영정과 고문서 등 선조의 유산을 보존하며 정신계승에 힘쓰고 있다. /서정현 기자 sjh@namdonews.com

정자공 종가 종택
식영정 전면의 느러지 풍경
식영정 현판
식영정 옆면과 영산강 느러지 전경
식영정 아래 풍광 좋은 초정쉼터
식영정 앞 고목 팽나무
영산강 제2경 ‘몽탄노적’(몽탄의 갈대 피리)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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