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콘텐츠 보물창고 광주·전남 종가 재발견
신라에 망명한 오나라 왕족 후예
여진·거란 물리친 문무겸장 배출
절의 지키며 은둔한 선비·학자들
정신 계승하며 유적 보존 힘써

향촌 은거해 선비 정신 실천한 가문

쌍산재 안채

지리산 서남쪽 섬진강이 흐르는 너른 평야가 한눈에 보이는 사도리에는 상사마을이 있다. 사도리는 도선국사가 고려 창업에 공을 세울 수 있도록 모래위에 삼국도를 그려 통일을 암시한 이인을 만났다는 설화에서 지명이 유래한다. 신라시대부터 천년의 유래를 가진 상사마을은 전국 제1의 장수마을로 유명하다. 마을 우물 ‘당몰샘’은 가뭄이나 장마에도 일정한 수량이 솟아오르고 이슬처럼 맑고 달콤한 전국 최상의 청정샘물이다. 장수비결로 꼽힌 당몰샘을 보존하며 이 마을에서 세거하는 해주오씨(海州吳氏) 문양공후 진사공파 오현우 종가를 찾아 가문의 내력을 살펴본다.

◇오나라 오태백 후예 오첨 시조
해주오씨는 신라 지증왕 때 5호16국의 난을 피해 망명한 오첨을 시조로 모신다. 해주오씨대동보에 따르면 고대 중국 황제 헌원의 26세손 태백이 오나라를 세우면서 오씨 성이 시작됐다고 한다. 은나라 말기 제후인 주공 단보(희씨)의 장남 태백은 높은 덕으로 왕위를 동생 계력에게 양보하고 중옹과 함께 양자강으로 남하해 오나라를 개창하고 오씨 성의 창시자가 된다. 와신상담, 오월동주 등 고사와 오자병법으로 우리나라에 알려진 오나라는 7백여년의 지속된 왕조다. 그 후손 오첨은 신라에 망명해 함양에서 살다가 고국으로 돌아갔고 아들 오응이 모친과 함께 함양에 남아 한반도 오씨의 번성을 일궜다. 오첨의 11세손인 오희(군호는 다련군)는 나주에 세거하며 호족으로 가문을 중흥시켰다. 그의 딸이 나주 완사천에서 왕건을 만나 결혼했고 고려가 건국되자 왕비가 되고 혜종의 모후가 됐다.

◇해주군 오현보 중시조
18세 오연총(1055~1116, 시호는 문양)은 과거 급제하고 벼슬은 기거랑, 병부시랑, 중서사인, 전주목사, 추밀원 좌승선 형부시랑, 상서좌승, 한림학사, 동북면병마사를 역임했다. 그는 요나라와 송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며 ‘태평어람’ 1천권을 구해왔고, 전주의 지방관으로 치적을 남겼으며, 병마사로서 징집제도를 개혁하고 신기군을 편성했다. 윤관과 함께 여진 정벌에 나서 9성을 쌓고 개선하는 공을 세웠다. 상서좌복야 참지정사, 수사도 연영전대학사, 중서시랑평장사 판삼사사를 거쳐 수태위 감수국사 상주국에 올랐다. 치원공신, 진국공신, 추충공신 등 세 번이나 공신에 올랐으며 북청 안북사, 곡성 덕산사에서 배향됐다.

24세 오현보(1168~1224, 군호는 해주군)는 낭장으로 명주민란을 진압하고 1216년 상장군 중군병마사로 거란 격퇴에 공을 세워 해주군에 봉해졌다. 벼슬은 중서문하성 참지정사에 올랐고 공주 금양단에서 추모한다. 그가 해주오씨의 중시조다. 그의 동생들 오현좌, 오현필도 거란전에 공을 세워 각각 동복군, 보성군에 봉해졌다. 오씨는 상계 역사를 공유하지만 오현보의 삼형제가 해주, 동복, 보성을 식읍으로 받은 연유로 분파됐고 세 고을을 관향으로 세대를 잇고 있다.

◇절의정신 지키며 후학양성
중시조 6세 오석은 상호군을 지내고, 7세 오담은 감찰규정을, 8세 오영은 삼사좌윤을 역임했다. 9세 오화는 가학을 이어 진사시에 입격하고 성균관에서 공부했다. 10세 오용려는 토산현감을 지내고 향촌에 은거했다. 11세 오극수와 그의 아들 오숙상이 진사시에 합격했다. 오숙상은 구례 사도에 입향해 은거하며 학문연구에 전념했다. 그가 진사공파를 열었다.

14세 오윤함은 영릉참봉을 지내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창의해 가솔을 이끌고 군량을 모아 군영에 전달한 공으로 중훈대부 군자감정 벼슬을 받았다. 그의 아들 오상지(1577~?)는 생원시에 합격하고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동생 오상우와 함께 의병창의해 청주까지 나아갔지만 화의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돌아왔다. 23세 오형순(1865~1940, 호는 쌍산)은 쌍산재를 짓고 서당을 열어 후학 양성에 힘썼다. 종가는 사친(事親), 권학(勸學) 등 14가지 실천덕목을 사당 현판에 걸어두고 자손들이 지키도록 했다. 벼슬을 멀리하고 살기 좋은 마을 양택에 정자를 짓고 학문하며 선비다운 삶을 실천한 선조들의 정신을 계승하는데 힘쓰고 있다. /서정현 기자 sjh@namdonews.com

쌍산재 현판
청원계 연못
종가 전경
별채와 쌍산재로 가는 대숲길
영벽문
경암당
쌍산재. 서당을 열고 학문연구하며 후학을 양성한 서당채
서당 벽면에 ‘원형이정 천도지상 인의예지 인성지강’을 써붙여 이를 화두로 삼고 성리철학을 탐구했다고 한다.
호서정
사당에 걸린 가훈현판. 27세인 종손 오경영씨에 따르면 선대 어르신께서는 효우와 문무를 다같이 소중히 여기며, 사친, 봉사, 존사, 돈목, 권학, 강례, 신언, 숭륜, 접빈, 택교, 절용, 휼궁, 원색을 권장하면서 모두를 실천하기란 어려운 일이니 어느 하나를 택해 실천하도록 가르쳤다고 한다.
장수마을 비결로 꼽히는 당몰샘. 명천이라는 표지석과 우물 벽에 “천년고리 감로영천(千年古里 甘露靈泉 천년 된 마을에 이슬처럼 달콤한 신령스러운 샘)”이라고 쓰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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