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콘텐츠 보물창고 광주·전남 종가 재발견
국방 상소로 유배된 정덕성 후예
문무겸비한 의로운 인물 배출
백전노장 해전비법, 승전에 주효
목숨바쳐 나라지킨 아들·손자

신무기 개발로 나라 지킨 명장 가문

안동사 전경

전남 고흥만 비봉산 자락에는 일제가 그 후손을 찾아 보복할 정도로 치명적인 군비개발에 전공을 세운 명장의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사는 안동마을이 있다. 1555년 을미왜변 이후로 수많은 침략을 격퇴한 해전의 명장이며 전라, 경상, 충청의 수사를 두루 역임하고 수군절도사 이순신의 조방장으로 파견된 판옥선 제작의 주역이 정걸장군이다. 절도사 이순신의 결정, 왜변 격퇴의 해전 경험을 가진 조방장 정걸의 착상과 현장지도, 나대용·송덕일의 제조기술, 이 삼자가 결합해 탄생한 것이 거북선이라는 주장이 있다. 포두면 안동마을에서 나라지킨 선조의 정신을 계승하며 세대를 잇고 있는 고흥 압해정씨 불우헌공파 정걸 종가를 찾아 가문의 내력을 살펴본다.

◇신라에 귀화한 당승상 정덕성 시조
우리나라 정씨(丁氏)는 당나라 대양군 정덕성(800~893)을 도시조로 모신다. 그는 당나라 등주(중국 하남성) 출신으로 과거급제하고 오원제의 반란을 평정한 공으로 대양군에 봉해졌으며 승상을 지내고 군국사로서 국경방비를 직간하다 전남 신안 압해도에 유배됐으나 사면된 후 돌아가지 않고 두 아들과 함께 신라에 귀화했다(853년). 그의 아들 정열도(819~905)는 당에서 문과급제하고 대사마 대장군을 지내던 중 부친과 함께 귀화했고 신라에 공을 세워 오성군(영광)에 봉해졌다. 둘째아들 정응도(822~909)는 당에서 문과급제하고 우부상서를 지내다 귀화해 신라에서 금성군(나주)에 봉해졌다.

21세 정진은 고려 고종 때 태학생원으로 봉명사에 발탁돼 원나라에 갔다가 함께 간 유경로는 귀환했지만 소임 완수를 위해 황제 알현을 요구하다 억류돼 끝내 돌아오지 못하고 사망했다. 23세 정찬(?~1364)은 문과급제해 밀직부사로 함경도 변란을 평정하고 공민왕 복위에 공을 세워 영성군(영광)에 봉해졌고, 이성계장군과 함께 홍건적을 격퇴했다. 간신 목충의 음해로 옥고를 치르다 옥사했다. 그의 아들 정광기는 정헌대부 판농시사 겸 지경연사를 역임했다.

◇최초 가사 ‘상춘곡’ 지은 정극인
26세 정극인(1401~1481, 호는 불우헌)은 생원시에 합격하고 무리한 흥덕사 토목공사에 대해 태학생과 함께 항소하다 유배된 후 태인에 불우헌을 짓고 은거했다. 문종 때 출사하여 문과급제하고 단종이 선위하자 전주부교수참진사 직을 내려놓고 낙향했다가 좌익원종공신록에 올라 성균관 주부, 종학박사, 사헌부감찰, 통례문통찬, 사간원정언을 역임하고 낙향해 후진양성에 힘썼다. 최초의 가사작품 ‘상춘곡’, 단가 ‘불우헌가’, 한림별곡체 ‘불우헌곡’ 등을 남기고 태인 무성서원에 배향됐다. 그가 불우헌파를 열었다. 그의 둘째아들인 27세 정칠현은 고흥 포두에 입향해 그 후손이 600여년 세거하고 있다.

31세 정걸(1516~1597)은 무과 급제해 훈련원봉사, 선전관, 서북만호를 거쳐 1555년 을묘왜변에서 도순찰사 이준경의 군관으로 출전해 왜구를 격퇴하는 공을 세웠다. 이후에도 달량왜변, 초포왜변, 태안왜변 등을 평정한 명장이다. 부안현감, 훈련원판관, 경상우수사, 전라수사, 장흥·창원부사, 전라병마절도사, 전라우수사, 충청수사를 지내며 선정을 베풀고 전공을 세웠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수군 조방장으로 전라도에 배치돼 당포, 옥포, 부산포해전에서 이순신장군과 함께 승전했다. 충청수사로 한강 방어 작전을 수행하며 행주산성의 권율장군에게 군선2척에 화살을 운반해 위급에서 구하고 승전에 힘을 보탰다. 80세 고령에도 한산도의 이순신 진중에 합류해 장군을 도왔다. 귀향 후 전쟁 피해복구와 농업환경 개선에 힘썼다. 그는 판옥선을 축조했고 곡방패, 화전, 철익정, 화경소 등 신무기를 개발했으며, 수십년 왜변 승전 경험을 토대로 판옥선 개조를 지도해 돌격선인 ‘거북선’을 제조하는데 기여했다. 고흥 안동사, 금산 금곡사에 배향됐다.

◇해전 불패의 숨은 주역 정걸장군
32세 정연(?~1597)은 무과 급제하고 수의·승의부위, 진용·충의교위를 거쳐정략장군 충좌위 중부장, 진위장군, 건공장군, 오위도총부경력, 영광군수를 역임했고 정유재란에 흥덕에서 전사했다. 그의 아들 정홍록(?~1598) 역시 무과 급제해 3대 무과급제의 무용을 드높였으며, 벼슬은 용교위, 무안현감, 낙안군수를 역임하고 정유재란에 의병군으로 활약하다 전사했다. 종가는 일제치하에 패전보복으로 불탄 종택에서 정걸, 정연, 정홍록 3대가 국가로부터 받은 교지 등 가문의 유물 34점의 가치를 인정받아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297호로 지정받고 국립진주박물관에 보존했다. 후손들은 안동사 등 유적을 보존하고 정걸장군 등 선조들의 족적을 현창하며 정신계승에 힘쓰고 있다.
/서정현 기자 sjh@namdonews.com

안동사
승유재
승유재 현판
정걸 교지(고흥 정걸가 교지류고문서 전남유형문화재 제297호)
정걸 영정
종택 안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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