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콘텐츠 보물창고 광주·전남 종가 재발견
탐라국 개국한 양을나 시조
고려말·조선중기 개혁가 배출
벼슬 삼가하고 은거해 도학 실천
의병 창의로 충절 정신 계승 힘써

국난엔 의롭게 순국...지조 높은 선비 가문

종가 사랑채

지석천이 흐르는 전남 화순 이양의 청영마을에는 고결한 선비정신을 지키며 평화롭게 학덕을 쌓아온 양씨 가문 후손들이 세거한다. 비록 벼슬에 나가지 않고 가학을 이어 학문에 전념할지라도 다가올 왜적의 침략 전쟁을 준비하고 국가 누란의 위기가 다가오자 목숨을 던져 나라를 지켰던 구국지사들을 배출한 가문이다. 화순 제주양씨(濟州梁氏) 참봉공파 양응필 종가를 찾아 지조 높은 선비로 살아온 가문의 내력을 살펴 본다.

◇고려 유격장군 양보숭 중조
제주양씨는 탐라국을 개창한 양을나(良乙那)를 시조로 모신다. 고려사는 태초에 한라산 북쪽 기슭 모흥혈(毛興穴)로부터 양을나, 고을나, 부을나 세 신인(神人)이 솟아 나와 수렵을 하면서 가죽옷을 입고 고기를 먹었다고 전한다. 신인들은 벽랑국 3공주와 혼인해 샘이 있는 비옥한 지역에 오곡을 파종하며 가축을 길렀고 자손 번성해 탐라국으로 발전하게 됐다고 한다. 이는 탐라 삼성혈(사적 제134호) 설화로 전해져 조선 중기엔 이곳을 성역화하고 현재까지 매년 합동 시제를 지내고 있다.

양을나의 후손인 양탕(良宕)이 559년 광순사로 신라에 들어가 진흥왕으로부터 양(梁)씨 성을 하사받았다. 후손 양순은 682년(신문왕 2년) 신라 한림학사를 지낸 후 한라군에 봉해졌다. 고려 명종 때 유격장군을 지낸 양보숭을 중조 1세조로 유격공계가 세계를 잇고 있다. 광주 충덕사에서 추모한다. 그의 아들 양준(1206~1276)은 검교예빈경 첨의시중 찬성사를 역임했다. 3세 양순(1253~?)은 과거에 장원급제해 직문한서를 거쳐 삼사 상국에 올랐다. 4세 양준(1272~1342)은 문과급제해 참문학사, 좌부승지를 역임했다. 5세 양석재(1310~?)는 문과급제해 공민왕의 개혁을 돕고, 국토에 침략한 왜구, 홍건적 등 외적을 격퇴한 명장으로 벼슬은 문하시중에 올랐다. 그의 첫째 아들 양한충은 문과급제해 종묘사령종부정을 지냈고, 둘째아들 양한현은 국자생원에 합격해 학문에 매진했다.

◇중종조 개혁 앞장선 명현 양팽손
11세 양팽손(1488~1545, 호는 학포)은 조광조와 함께 문과 급제하고 개혁에 앞장선 기묘명현이다. 벼슬은 정언, 전랑, 수찬, 교리 등을 역임했다. 중종조에 소격서 혁파와 위훈 삭제 등 개혁에 힘썼으며 기묘사화엔 조광조 구명항소의 대표자가 돼 삭탈관직 당해 낙향하고 학포당에 은거했다. 능주에 유배된 조광조가 사약을 받자 기꺼이 시신 수습과 장사를 치렀다. 21년만에 복직하고 용담현령을 역임한 후 아들 8형제(양응기, 양응태, 양응정, 양응필, 양응덕, 양응국, 양응돈, 양응명) 등 후진을 양성하며 여생을 보냈다. 수원 심곡서원, 화순 한천 죽수서원에서 조광조와 함께 추모한다. 향촌 유림들이 부조묘(화순군 향토문화유산 제7호)를 세워 길이 추모하고 있다.

그의 아들 양응정(1519~1581, 호는 송천)은 문장가로서 경학과 병법을 연구하고 강론한 전란 대비의 선각자였다. 그는 1555년 을묘왜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고 양달사, 백세례를 의병장으로 출전시켜 최초의 의병 승전을 이끌었다. 이듬해 문과에 나가 ‘남북제승대책’이란 부국강병책을 주장해 장원급제했고 그와 철학문답 서신을 주고 받은 율곡이 10만양병설을 주장했다. 그에게 배운 제자 중 최경회, 박광전, 김덕우, 안중묵, 최경운, 최경장, 신립, 정운, 백광훈, 백광성 등이 국란에 활약한 인물들이다.

◇전란·늑약엔 행동하는 선비
양팽손의 넷째아들인 12세 양응필은 사화에 가문이 화를 입자 효우에 힘쓰고 경학 연구에 전념했으며 건원릉참봉에 천거됐으나 나가지 않았다. 그가 참봉공파를 열었다. 그의 아들 양산욱(梁山旭, 1551~1606)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화순 유위장으로 의병 5백명을 모집해 사촌 양산숙(양응정의 아들)이 있는 단양의 김천일 의병군에 인계하고 돌아왔으며 자해도에 군량을 운송해 진주성에 공급토록한 공으로 예빈사봉사에 임명됐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14세 양효용은 독서에 전념하고 은둔한 처사로서 남주고사(南州高士, 남국의 지조 고결한 선비)라 불렸다. 그의 동생 양제용(1589~1637, 호는 칠송)은 정묘호란에 창의해 임금을 호위했고 병자호란에는 옥과현감 이흥발의 격문에 부응해 군량과 의병을 모아 청주로 진군했다가 화의 소식을 듣고 분격해 병을 얻어 사망했다. 15세 양지남(1608~1681)은 은봉 안방준의 문하로 병자호란에 동생 양주남과 함께 안방준 의병군에서 활약했다.

25세 양회일(?~1908, 호는 행사)은 시문에 능해 추앙받는 한말 의병장이다. 그는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가산을 털고 의병을 모아 화순 ‘쌍산의소’ 일대에서 주둔하며 훈련한 의병군을 이끌고 화순 동복 능주 등지의 일본헌병분파소를 격파하는 등 활약하다 격전 끝에 붙잡혀 무안 해제 지도로 유배됐다. 풀려나자 재기하려다 일본 헌병에 잡혀 장흥감옥에서 옥중 단식 7일만에 순국했다(건국포장). 후손들은 그가 살았던 쌍봉리 마을에 순의비를 세워 행적을 기리며 선조들의 정신계승에 힘쓰고 있다 .
/서정현 기자 sjh@namdonews.com

양팽손 추모 영모재
쌍산의소 막사터(雙山義所 사적 제485호). 양회일 의병부대의 주둔지인 쌍산 항일의병 유적지로서 무기제작소, 유황굴, 의병성과 막사터가 남아있다.
양회일 순의비
종가 안채
양응필 추모 영모재
장독대
청영마을표지석
삼성사도. 삼성혈과 세 시조 추모 사우 도면 이미지(제주양씨 참봉공파보에서 인용)
양팽손 영모재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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