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콘텐츠 보물창고 광주·전남 종가 재발견
고려 문하평장사 기순우 중시조
세종 발탁한 청백리 기건 중흥조
기묘명현 기준·성리학자 기정진
학맥 이어 도학 실천한 의병장들

청백리 정신 계승한 대학자 가문

고산서원 전경

장성 진원 불태산 자락 고산마을에는 고산서원이 있다. 조선 후기 대학자 기정진이 담대헌이라는 정사를 지어 학문을 강론하던 곳에 사당과 제향시설, 강학공간과 장판각 등을 갖춘 서원으로 건축돼 노사선생전집 목판 862매 등을 보존하고 있다.(장성 고산서원 노사선생전집 및 답문류편목판,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14호) 호남 인재를 배출한 학문의 전당이었던 유서 깊은 서원을 보존하며 학덕을 계승하고 있는 장성 행주기씨(幸州奇氏) 참판공파 노사종가를 찾아 가문의 내력을 살펴본다.

◇마한 왕자 기우성 시조
행주기씨는 은나라 종친인 기자의 49세손 기우성을 시조로 모신다. 마한 8대 원왕 훈의 세 아들 중 우평은 태원선우씨, 우량은 청주한씨, 우성은 행주기씨가 됐다고 한다. 역사 고증이 어려운 시대를 경과하고 기자의 66세손인 고려 문하평장사 기순우를 중시조 1세로 계대를 잇고 있다.
10세 기건(1390~1460, 호는 청파)은 이름 높은 학행으로 세종에 발탁돼 지평, 연안군수, 제주목사, 집의, 형조·이조참의, 전라도관찰사, 전주부윤, 호조참판을 거쳐 대사헌, 판중추원사에 올랐다. 그는 연안, 제주 등 지방관으로 나갔을 때 백성의 고충을 살피고 풍속을 교화해 선정을 베풀었고, 내직에서는 권력을 농단하는 신하들을 탄핵했으며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관직을 버리고 두문불출해 절개를 지켰다. 그는 청백리에 녹선돼 장성 추산서원에 배향됐다.
12세 기찬(1444~1492)은 문과급제해 이조정랑, 한림, 응교를 지냈다. 그의 아들 5형제가 가문을 중흥시켰다. 큰아들 기형은 문과급제해 사헌부지평을 지냈다. 넷째아들 기진(1487~1555)은 진사시에 입격했다. 다섯째 아들 기준(1492~1521, 호는 복재)은 조광조의 문인으로 문과 급제해 사관, 정자, 박사, 장령, 시강관을 역임하고 응교로 있을 때 기묘사화에 유배됐다. 모친상에 귀향했으나 다시 무고로 신사무옥에 연루돼 유배지에서 교살됐다. 그의 시는 해동시선, 대동운부군옥 등에 수록됐고, 복재집, 무인기문, 덕양일기 등을 남겼다. 그는 기묘명현으로 문민공 시호를 받아 온성 충곡서원, 아산 아산서원, 고양 문봉서원 등에서 추모한다.

◇사화 연루된 기묘명현 형제 은거
기준의 기묘사화 피화로 인해 기찬의 둘째아들 기원과 넷째아들 기진은 장성과 광주로 이거해 입향했다. 기원의 손자인 15세 기효간(1530~1593, 호는 금강)은 김인후, 이항의 문인이며 숙부 기대승에게 공부해 ‘호남의 은덕군자’로 알려졌다. 동문인 김천일, 정철, 변이중 등과 교유하며 장성 황룡면 아치실(아곡리)에 인재(훗날 망정와, 하남정사, 백석헌으로 개칭)를 짓고 자신을 금강거사로 부르며 후학양성에 힘썼다. 장성 추산서원에서 추모한다. 그의 동생 기효근(1542~1597)은 예문과 서법에 능했으나 무과에 급제해 선전관, 남해현령으로 전선과 병기 등 군비를 수리했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원균 휘하에서 선봉으로 해전에 참가했고, 정유재란에 병으로 귀향하다 적병을 만나 어머니와 함께 투신 순절했다. 선무공신 3등으로 개백군에 봉해졌다.
기효간의 아들인 16세 기계헌은 용양위부사과를 지냈다. 18세 기진탁은 송시열의 문인으로 18살에 진사시에 입격한 학자로서 요절했으나 명시를 물염정에 남겼다. 21세 기종상(1718~1776, 별호 용암처사)은 독실한 효행으로 알려져 정려문을 하사 받았다. 22세 기태온(1738~1815, 호는 망정와)과 그의 동생 기태검(1759~1824, 호는 근재)은 가학을 이어 생원시에 입격했다.

◇성리철학 완성한 학자 배출
24세 기정진(1798~1879, 호는 노사)은 양친을 여의고 장성 아치실 망정와에서 공부해 독자적인 궁리와 사색으로 300년 지속된 주리 주기 논쟁을 극복하고 이일분수론을 정립함으로써 성리학 체계를 완성한 대학자다. 그는 생원시에 1등 입격해 참봉, 평안도도사, 무장현감, 사헌부장령, 사헌부집의 등에 임명됐으나 끝내 출사하지 않았고 다만 전설사별제에 취임 6일만에 병을 핑계로 귀향했다. 삼정문란을 치유할 백성구제책을 제시했으며 그는 태극도설을 논한 ‘정자설’, 사단칠정을 논한 ‘우기’, 율곡의 이통기국설을 평론한 ‘이통설’, 핵심 철학을 기술한 ‘납량사의’와 ‘외필’등을 저술했고, 노사집, 답문유편을 남겼다. 시호는 문간이고 장성 고산서원, 화순 삼산사 등에서 추모한다.
그의 손자인 26세 기우만(1846~1916, 호는 송사)은 학덕으로 존경받았던 선비 의병장이다. 기정진의 학업을 이어 진사시에 입격하고 명성황후 시해사건, 단발령 등에 통분의 상소를 올렸으며 1896년 광주향교에서 의병창의해 장성 기삼연 의병군이 합세하자 호남창의 의병총수가 됐다. 광주 광산관을 본영으로 의병군을 주둔시키다가 고종의 명령에 따라 해산했고, 다시 장성에서 창의해 활약하다 왜군에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순천 조계산에서 재거사를 꾀하던 중 고종 퇴위 소식을 듣고 해산, 은둔했다. 송사집을 남겼고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후손들은 문집, 간찰, 일기 등 고문서와 고산서원 등 문화유산을 보존하며 가문의 학덕 계승에 힘쓰고 있다.
/서정현 기자 sjh@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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