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비 정권이 동학농민군을 제압하려고 청나라에게 구원병을 요청한 것은 엉뚱한 방향으로 사태를 몰아가고 있었다. 그중 잘 훈련된 일본군의 위세는 청군을 압도했고, 러시아 공사관도 눈치를 보고 있었다. 이런 사실을 제대로 간파한 사대부는 없었다.경복궁에 주둔한 조선군 병력이 기백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첩보에 따라 오시마 혼성여단장은 혼성여단 8000명 중 1000명씩 동서 쪽에 분산 투입했다. 그는 경복궁 서쪽의 영추문과 동쪽의 건춘문에서 일본군이 동시에 공격해 조선군 경비병을 혼비백산시킨 뒤 궁을 점령하도록 명하고, 왕이 묵고 있는 향원
"좋다. 나가보라. 출동 준비를 완벽히 갖추도록 내 명을 각 부대에 하달하라.""합!"요시무라가 절도 있게 경례를 착 올려붙이고 밖으로 나갔다. 저벅저벅 문밖으로 사라지는 요시무라 다케오 첩보대장의 뒷모습을 보고 오도리 게이스케 주조선일본공사와 오시마 요시마사 주한일본군 혼성여단장은 동시에 가슴 벅찬 뿌듯함에 젖어 몸을 부르르 떨었다.청나라 군대는 조선 조정의 청병을 요구받고 1894년 5월 5일 아산만을 통하여 약 3000명의 병사를 조선에 파병했다. 청나라는 톈진조약에 따라 일본에 파병 사실을 알렸고, 일본은 이에 재빨리 일본
오도리 게이스케 주 조선 일본 공사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도 무릎을 쳤다. 실로 기회인 것이다. 요시무라 첩보대장이 힘을 얻어 자신 있게 설명하였다."이성적 태도라면, 그리고 기왕에 이런 마당이라면, 왕실과 동학군이 서로 양보하여 공존·공생·공영하는 길이 무엇인가를 찾아 나서서 나라 발전의 동력을 찾아야 하는데, 다행히도 우리 대일본제국으로 보아서는 그들이 원수로 대립 충돌하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무니까? 개입하기 딱 좋은 기회이무니다.""우리가 조선 왕실을 도와 동학군 섬멸에 나서면 조선 조정은 우리에게 감읍한다는 것인가?
이때 요시무라 첩보대장의 대답은 거침이 없었다."오시마 혼성여단장 각하, 각하야말로 대일본 제국의 제일검 아니무니까? 각하의 칼날 하나에 조선의 산천초목이 바르르 떱니다. 걱정 묶어두시기 바라무니다.""그대가 나를 잘 안다?""안다마다요. 각하의 칼이면 조선 왕실은 하루아침에 개박살나버리무니다.""허허허…"오시마 혼성여단장의 어깨에 뽕이 잔뜩 들어갔다. 아첨과 칭찬의 말에는 고래도 춤추게 하는 것이다. 요시무라가 그동안 첩보 사항을 점검한 결과, 조선 왕실은 언제 무너져도 무너질 운명에 있었다. 손가락만 살짝 스쳐도 가루가 되어 폭
요시무라 다케오 첩보대장이 코웃음을 쳤다."헤헤, 오시마 요시마사 혼성여단장 각하. 본시 중국 군대라는 것이 당나라 군대 아니무니까? 절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고, 체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고, 싸울 의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고, 훈련하는 것도 아니고 노는 것도 아니고, 참으로 애매한 군대이무니다. 조선 땅에 파병되었지만 왜 파병되었는지, 그래서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군사들이무니다. 지휘부 또한 군졸보다는 나을 뿐, 군인으로서의 사명감도 용기도 기개도 없는 수수깡 같은 무리들이무니
일본군 첩보 대장 요시무라 다케오가 다급하게 주(駐) 조선 일본 공사관을 찾았다. 긴급 호출을 받고 찾은 것이었다. 정문 경비병의 안내를 받아 공사 집무실로 들어서자 오도리 게이스케 공사가 긴장된 모습으로 그를 맞았다. 그의 옆에는 주한 일본군 혼성여단장 오시마 요시마사(大島義昌)가 긴 칼을 옆구리에 차고 역시 침통한 표정으로 판자 바닥을 쿵쾅거리며 사무실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러면서 어떤 결의에 찬 모습으로 연신 요씨, 요씨를 연발하였다."첩보대장 요시무라 다케오, 인사 올립니다!"첩보대장이 그들 앞에 이르러 각도 있게 거수경례
군사가 몇 명이냐고 묻는 것은 군사 기밀을 알아내겠다는 것과 같다. 더군다나 봉대산의 봉수대 연락을 통하여 임자도와 지도, 낙월도 쪽에서 젊은 장정들이 들어온다는 봉화가 전달되었으니 지금 숫자가 얼마가 된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었다.하지만 죽헌은 군사 숫자를 묻는 그 나름의 생각이 있었다."내가 왜 군사 숫자를 묻는지를 말하겠소. 나는 동네 앞 바다를 간척하여서 천석군이 되었소. 그중 남는 쌀이나마 군량으로 쓰도록 지원하기 위해서요."최선현이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까지 주민들이 무언가를 지원하고 싶어도 두려워서 못하고 있는
그러자 누군가가 아는 체를 했다."가짜라고 안 한가. 저 선비는 가짜 증서를 받고 고뇌한 나머지 위선 사회의 일원이 될 수 없다고 양심선언을 하신 분이여. 신분과 권한을 증명하는 증서를 찢어부린 분이랑게. 그 정신을 알고도 모르겄어."죽헌 이윤서는 먼 집안의 이응서가 농민 군사를 이끌고 북상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그 길로 해상로를 타고 무안 해제로 들어갔다. 육상은 길이 발달하지 못하여 해제 사람들은 함평만 해상로를 타고 북쪽의 육지를 오르내렸다.칠산바다를 건너 임치진에 이르자 일군의 농민 군사들이 훈련에 열중이었다. 인근 석
일시에 군중들이 호방에게 대들었다."이런 상녀르 새끼, 곱게 키운 남에 딸을 겁탈해부러?""이런 놈은 죽여불장께!""이런 놈들 땀시 고을 민심이 흉흉해. 딸을 어디 내보내들 못한 당게!"호방이 반발하였다. 상황이 대단히 심각한지라 변명부터 하고 보자는 것이다."나도 딸 기른 아비요. 어떻게 남에 귀한 자식을 욕보이겠소, 천부당만부당한 말잉께 그런 말 접으쇼.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손부리 입부리 좁부리 중 젤로 좁부리를 조심하는 사람이요. 절대적으로 그런 못된 짓 하는 사람이 아니오.""이놈 인성 보소. 거짓말을 대놓고 하구만이. 저
그중 민중의 원성이 높은 이방부터 조졌다."이방 나오너라."젊은 나졸과 서리(胥吏)·이속(吏屬)이 끌려 나오고, 그들의 댓방인 이방이 끌려 나왔다. 이방은 떡이 되도록 매타작부터 받았다."이방 너는 육방(六房) 가운데 수령을 보좌하면서 백성의 민심을 살펴야 하는디, 인사 실무를 맡은 권한을 남용하여서 백성들을 어지간히도 괴롭혔다. 얍삽하고 간사한 생김새대로 백성을 쥐어짠 것을 알고 있도다. 수령에게 바친 것이 얼마냐? 시방 수령을 어디다 숨겼느냐?"이방이 실눈을 뜨고 같잖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의 코밑에 붙어있는 빈약한 팔자수염이
백지징세(白地徵稅)는 수확이 없는 땅에 세금을 매기거나 납세 의무가 없는 사람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일종의 사기 징세법이다. 백지(白地)는 농사를 지었어도 쭉정이만 남은 땅을 말한다. 백징(白徵)은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땅에 세금을 부과하는 것을 말하였다. 현장 관리가 아니라 장부상의 기록을 가지고 장난하는 경우가 많아 관리의 농민 착취는 다반사로 이루어졌다."과도하게 세금을 부과해 착복하는 것을 하나의 특권처럼 여기는 것이 지방 관리의 행태요. 이것들 쌔래 죽이고 나도 죽어불랍니다."농민은 분이 나서 울부짖었다."그자가 누구렸다?"
봉덕이 소리쳤다."노팽식, 물러서지 못할까? 시방 세상이 달라졌어. 처처에서 백성들이 일어나고 있다. 아낙들도 들고일어날 참이여. 하인들은 이응서 마님을 따르라.""성도 없는 놈이 작은 마님 편에 섰다고 우쭐대는구나. 근본 없는 새끼야, 세상이 어떻게 달라졌다는 거냐. 당장 물렀거라!"그러자 하인들이 우르르 노팽식에게 다가들었다. 사뭇 위협적인 태도였다. 그들 역시 성이 없는 자들이었다.조선 사회에서 근본 없이 자라는 것은 성씨나 본관이 불분명한 부류라는 의미였다. 하층민, 천민, 노비 등 공식적인 신분 기록에서 소외된 계층이다.
동학 접주가 각 고을의 집강이 되어 행정업무 수행과 치안질서를 유지한다. 집강 아래 서기·성찰·집사·동몽 등의 임원을 두어 행정사무를 맡게 하고, 각종 정책을 수행하는 것이다. 이응서는 광주와 광산과 담양이 인접한 하남을 지정해 집강소를 설치하려는데 우선 재정 확립이 필요하였다. 재정 문제는 민폐를 끼칠 수 없어 집안에서 쌀을 내놓으려고 하는데 아버지 이유구를 설득할 명분이 없는 것이다."도대체가 너희 놈들이 불한당이 아니고서야 맨 정신으로 관아의 존재를 부정하고 자치 기구를 세워? 나는 그런 것 받아들이지 않는다.""아버님, 이미
도박판의 판돈이라고 소를 끌고 나가고, 쌀가마니나 빼돌린 것을 동학농민군 보급투쟁 자금이라고 하였다. 이 씨 집안이 농민군에 재정 지원을 했다고 한다면 당장 관아로부터 체포령이 내려질 것이고, 이웃 주민들도 불안하여 밀고하는 사태까지 벌어질 수 있다. 도박판의 재산 탕진은 이해하여도 반역도에게 자금을 지원했다면 변명의 여지없는 중죄인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주색잡기에 빠져든 것처럼 위장했다는 것이다.이유구는 자식이 주색잡기에 빠져들어 가산을 탕진했다는 것도 용서할 수 없지만 동학에 가담했다는 것은 집안 망할 일이라고 펄쩍 뛰었다."
만덕 스님의 말을 듣자 김도향은 누구에겐가 사기당하며 살아온 기분이었다."저는 그저 유복한 집안의 외동딸로 태어나 함풍 이 씨 부잣집으로 시집을 갔을 뿐이어요. 여종의 시중을 받고 동백기름 머리에 바르고, 명경 들여다보며 얼굴 다듬는 것이 일과였지요. 그란디 여성은 남자의 종속물이라고요?""그대는 특수한 신분의 최정점에 서있는 우리나라 영점오할 이내에 해당하는 신분이여. 그러니 여성의 고달픔과 고통을 알지 못하고 살아왔다고 봐야제. 하지만 조선의 여성은 자기가 세상으로부터, 가정으로부터, 모든 제도로부터 억압받고 사는 미천한 신분이
천민 개념에 대한 설명이 부족했던지 만덕 스님의 설명이 이어졌다."칠천(七賤)은 국가에 소속된 천인(賤人) 신분이고, 노비는 개인의 소유물로 취급되었으나 둘 다 지배층과 양반층이 데려다 쓰는 노동 자원인 것은 같네. 이중 노비는 매매가 가능하였고 말이여. 노비 신분은 기생, 혜장(鞋匠:헌 신을 깁는 신기료장수), 백정, 무당, 영인(伶人: 악공과 광대), 사령(使令:심부름꾼) 승려 등일세. 모두 각 처소에 중요한 인간들인디, 한갓 그들의 소모품으로 쓰고 있단 말이시. 이러니 나라의 단합과 응집력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중 신분인 나
노비들을 자유인으로 풀어놓는다니까 당장 집안의 노비들부터 반대하고 나섰다. 장성의 백양산록에서 함께 며칠을 보냈던 봉덕과 춘심이가 더 펄쩍 뛰었다."큰 주인마님, 작은 마님이 이상한 요승을 만난 이후로 머리가 어째 돌아부렀는가비요. 세상에 없는 생각을 다 하니 잡귀가 든 모양입니다. 이번 참에 단도리를 단단히 해야 할성 부릅니다.""단도리를 해야 한다면?"큰 어른 이유기가 물었다."다리몽둥이를 분질러놓든지, 팔을 뽑아버리든지, 어디 출입을 못하도록 해야 한다니께요. 우리를 풀어주면 어디 가서 발붙이고 살겄습니까이."춘심이도 울상이었
만덕 스님이 말을 이었다."곡창지대인 전라도가 착복하기 좋은 환경이니 인정사정 볼 것 없이 관이 재산을 훑어가버리니 견딜 수가 있나. 특히 조세 징수를 빙자로 아전들까지 날뛰며 자신들의 배를 채우니 이런 불상놈의 세상이 어디 있단 말인가. 전라도는 정의감이 불타는 고장이여. 가난한 이나 재산 가진 이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정의감이 남다르단 마시. 그란디 이렇게 피해를 본 전라도 민중들이 혁명의 불꽃을 태우는 것은 당연한 이치제. 다산 선생이 가신 지도 어언 50년(1836년)이 지났건만 나라는 여전히 부패하고 무능하고, 무엇 하나
애절양(哀絶陽=양물을 자른 슬픔)을 모두 암송한 뒤 휴- 길게 한숨을 내쉬던 만덕 스님이 독백하였다."이것이 과연 시일세. 백성들이 흉년에 고통을 받고 사는디 한가롭게 달과 구름과 강물을 보며 기생을 끼고 술잔을 기울인다는 음풍영월(吟風詠月) 따위가 시인가?"이응서는 상당한 수준의 글을 배웠으나 시 구절 중 모르는 한자음이 많았다."뜻은 어느 정도 알겄는디 어려운 한자들이 많아서 현학성이 엿보이는군요. 어려운 문자를 골라 쓰는 것, 그것이 학자들의 한계 아닌가요?""현학성이 아니라 중국 고사나 당송(唐宋) 시절의 고사를 인용하니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