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좋다. 나가보라. 출동 준비를 완벽히 갖추도록 내 명을 각 부대에 하달하라."
"합!"
요시무라가 절도 있게 경례를 착 올려붙이고 밖으로 나갔다. 저벅저벅 문밖으로 사라지는 요시무라 다케오 첩보대장의 뒷모습을 보고 오도리 게이스케 주조선일본공사와 오시마 요시마사 주한일본군 혼성여단장은 동시에 가슴 벅찬 뿌듯함에 젖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청나라 군대는 조선 조정의 청병을 요구받고 1894년 5월 5일 아산만을 통하여 약 3000명의 병사를 조선에 파병했다. 청나라는 톈진조약에 따라 일본에 파병 사실을 알렸고, 일본은 이에 재빨리 일본 거류민과 공사관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8000의 병력을 5월 6일 제물포항에 상륙시켰다.
일본군은 그동안 제물포의 외항에 대기하면서 기회를 엿보았고, 청군의 상륙에 기민한 기동력을 발휘한 것이다. 일본군은 갑신정변(1884)과 임오군란(1892) 이후에도 군사를 철수하지 않고 인천 해안지대에 주둔시켜놓고 조선의 동향을 살폈다. 자국민 보호를 위해 일정 정도의 병력을 주둔시킬 수 있다는 제물포조약에 의거한 것이었으나 과도한 주둔군이었고, 청군은 철수했는데도 미적거리다가 청군이 재파병하자 이를 기화(機化)로 재빨리 상륙해버린 것이다. 미래를 대비하기 위한 치밀한 전략이었다.
이후 일본군의 첩보활동과 전술전략은 용의주도하였다. 신식 근대전의 전형을 가지고, 이른바 FM(야전교범:Field Manual)대로 원리원칙에 투철한 전법을 익히고 있었다.
오시마 혼성여단장이 요시무라 첩보대장을 다시 불러들였다.
"동학군을 부수기 위해 청군이 아산만에 상륙하였는 바, 미리 알아내야 할 것이 있다. 정탐한 결과, 왕은 평안하시던가?"
"왕은 대단히 평안하시무니다. 임금은 요사이 몸살 기가 있어서 침소에서 잘 나오지 않고 있는바, 궁궐은 그래선지 고요 적막하무니다. 간혹 무당들의 굿소리가 궁궐의 무거운 분위기를 깨고 있을 뿐이무니다."
"그들도 은폐술에 능한 것 아닌가? 놀라운 전술이 숨어있을 수 있다. 잠자는 척하고, 일격에 우리 일본군을 베버릴 기습 전술 말이다."
"무능이 적을 벨 수 없으무니다, 무당이 막강 화력을 제압할 수 없으무니다. 이 점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으무니다. 하하하."
"너무 야도리치는 거 아닌가?"
"믿어도 좋스무니다. 예의범절을 좋아하는 왕에게 찾아가 정중히 인사하면 백 프로 무장해제이무니다. 우리의 위계에 저들이 넘어가는 순진한 자들이무니다. 하하하."
그 웃음 속에는 어떤 경멸과 조롱이 담겨있었고, 당장 쳐들어가도 좋다는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일본군은 숫자만도 8000명으로 압도적으로 많았고, 혼성 여단이지만 군의 수준이 당나라 군대 같은 청나라 군대나 조선군과는 차원이 달랐다. 전술, 전략, 병사 훈련, 무기 다루는 솜씨 등이 칼의 나라답게 뛰어난 전술 전략을 가지고 있었다. 그중 자신 있는 것은 사기가 하늘을 찌르는 용맹성이었다.
조선군과는 너무도 대조적이었다. 조선은 군사가 전통적으로 문반(文班)의 하위 개념으로 늘 사대부의 그늘에 가려졌고, 처우 또한 형편없었다. 무시받는 때문인지 군사는 직업적 사명감도 결여되어 있었다.
난리가 나면 고을의 수령이나 문반 중에서 장수로 발탁되니 전문성 또한 현저하게 떨어졌다. 사서삼경이나 통독하고 유교 윤리로 정사를 돌봤으니 현실 감각도 떨어지고, 칼 한번 휘둘러보지 못한 몸으로 지방 사령관이 되어 군사를 지휘하니 전략이나 전술이 제대로 나올 리 만무했다. 장검 하나가 붓대롱 하나보다 못한 상황이니 부대 배치된 군교나 병사의 기강과 군기는 허약하고, 군사 숫자를 채워놓았다고 해도 여차하면 튀어버리는 막장 군대였으니 군대라고 할 것도 없었다. 대신에 군인보다 백성들이 총칼을 들고 나서면 용맹하였다. 임진왜란 때도 나라를 구한 사람들이 정규군이 아니라 의병과 승병들이었다.
주한 일본 공사 오도리 게이스케는 용산에 주둔 중이던 일본군에게 경복궁 포위를 지시했다. 오시마 요시마사 혼성여단장의 주도로 경복궁 습격이 진행되었다. 1894년 6월 21일(음력) 자정이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