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에꽃 최두석새벽 시내버스는차창에 웬 찬란한 치장을 하고 달린다.엄동 혹한일수록선연히 피는 성에꽃어제 이 버스를 탔던처녀 총각 아이 어른미용사 외판원 파출부 실업자의입김과 숨결이간밤에 은밀히 만나 피워 낸번뜩이는 기막힌 아름다움나는 무슨 전람회에 온 듯자리를 옮겨 다니며 보고다시 꽃이파리 하나, 섬세하고도차가운 아름다움에 취한다.어느 누구의 막막한 한숨이던가어떤 더운 가슴이 토해 낸 정열의 숨결이던가일없이 정성스레 입김으로 손가락으로성에꽃 한 잎 지우고이마를 대고 본다.덜컹거리는 창에 어리는 푸석한 얼굴오랫동안 함께 길을 걸었으나지
청춘 박남준맑은 사랑이 있었다.까닭 모를 그리움이, 미움이, 원망이, 눈물이 없었는가,한숨은, 영원한 것은 없는가안타까움에 날밤을 새던,뒤돌아 보면 아득한데 사랑은 어디서 왔나그 솟아나던 그리움은,이제 다시 돌아가지 못하리라 문청 시절 즐겨 불렀던 노래이자 인문대 학생회 주제가 제목이 '청춘'이었다. "청춘, 청춘을 빛나게 살자. 청춘, 청춘을 값있게 살자. 한생에 다시 없는 황금의 시절." 정확하진 않지만 가사가 이랬던 것 같다.청춘을 정량적인 나이로만 따지는 것은 옳지 않다. 가슴팍의 뜨거움과 열렬함에 무게를 더 두는 것이 옳다
간격 이정하그대와 나 사이에간격이 있습니다엄청난 것도 아니면서늘 그것은 일정하게 뻗어 있어나를 절망케 합니다그러나 나는 믿습니다서로 다른 샘에서 솟아나온 물도끝내는 한 바다에서 만남을그대와 나지금은 잠시 떨어져 있지만나중에는 한 몸입니다우리 영혼은 하나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일정한 간격이 있다. 물리적 간격도 간격이지만, 심리적 간격이 더 절대적일 때가 많다. 다만 그 간격이 가까운지, 덜 가까운지, 아니면 멀리 있는지에 따라 서로를 대함이 다르다. 1박 2일 진학부장들과 워크숍을 했다. 더욱 친해지고 더욱 가까워졌다. 같이
하나뿐인 예쁜 딸아 곽의영나는 너의 이름조차 아끼는 아빠너의 이름 아래엔행운의 날개가 펄럭인다웃어서 저절로 얻어진공주 천사라는 별명처럼아, 너는 천사로 세상에 온 내 딸빗물 촉촉이 내려토사 속에서연둣빛 싹이 트는 봄처럼 너는 곱다예쁜 나이, 예쁜 딸아늘 그렇게 곱게 한 송이 꽃으로시간을 꽁꽁 묶어 매고 살아라너는 나에게 지상 최고의 기쁨저 넓은 세상에서 큰 꿈을 펼쳐라함박꽃 같은 내 딸아. 꽃들이 저마다 피어나는 시기가 다르듯이 이번 수능 성적표가 모든 걸 담아내는 것은 아니다. 학교에서 꿈꾸며 보내온 시간들, 친구들과 함께 공부해
꽃의 자존심 정일근뭉쳐놓은 듯 버려놓은 듯 땅에 바짝 엎드려꽃자루 없이 앉은뱅이 꽃 피우는 노랑 민들레흔해서 보이지 않고 흔해서 짓밟히는 꽃이 제 씨앗은빛으로 둥글게 빚는 바로 그 순간하늘로 꽃대 단숨에 쑥쑥 밀어 올리는 꽃의 마지막 자존심이 있다 11월 13일은 수능시험일이다. 국무회의에서 통과되고, 비행기도 안 뜨는 강력한 시험, 17개 시도교육청이 동일한 지침으로 동일하게 시행하는 시험.대학입시를 준비하는 수험생들 모두 같은 날, 같은 시간에, 같은 수능시험을 치른다. 시험 한 번, 오직 단 한판으로 합격과 불합격이 결정되
11월 나희덕바람은 마지막 잎새마저 뜯어 달아난다그러나 세상에 남겨진 자비에 대하여나무는 눈물을 흘리며 감사한다길가의 풀들을 더럽히며 빗줄기가 지나간다희미한 햇살이라도 잠시 들면거리마다 풀들이 상처를 널어 말리고 있다낮도 저녁도 아닌 시간에,가을도 겨울도 아닌 계절에,모든 것은 예고에 불과한 고통일 뿐이제 겨울이 다가오고 있지만모든 것은 겨울을 이길 만한 눈동자들이다 가을이라고 하기엔 좀 춥고, 겨울이라고 하기엔 좀 덜 춥다. 단풍을 보니 가을이고, 낙엽을 보니 겨울이다. 한낮의 햇볕은 가을이고, 아침저녁 찬바람은 겨울이다. 가을과
너를 기다리는 동안 황지우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내 가슴에 쿵쿵거린다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 곳에서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너였다가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다시 문이 닫힌다사랑하는 이여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견딜 수 없네 정현종갈수록, 일월(日月)이여,내 마음 더 여리어져가는 8월을 견딜 수 없네.9월도 시월도견딜 수 없네.흘러가는 것들을 견딜 수 없네.사람의 일들변화와 아픔들을견딜 수 없네.있다가 없는 것보이다 안 보이는 것견딜 수 없네.시간을 견딜 수 없네.시간의 모든 흔적들그림자들견딜 수 없네.모든 흔적은 상흔(傷痕)이니흐르고 변하는 것들이여아프고 아픈 것들이여. 살다 보면, 흘러가는 것들이 있고, 변하는 것들이 있고, 보이다 안 보이는 것들이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흐르고 변하는 것들, 아픈 것들이 많아진다. 나이를 더할수록 힘
자작나무에게 정호승나의 스승은 바람이다바람을 가르며 나는 새다나는 새의 제자가 된 지 오래다일찍이 바람을 가르는 스승의 높은 날개에서사랑과 자유의 높이를 배웠다 나의 스승은 나무다새들이 고요히 날아와 앉는 나무다나는 일찍이 나무의 제자가 된 지 오래다스스로 폭풍이 되어폭풍을 견디는 스승의 푸른 잎새에서인내와 감사의 깊이를 배웠다 자작이여새가 날아오기를 원한다면먼저 나무를 심으라고 말씀하신 자작나무여나는 평생 나무 한 그루 심지 못했지만새는 나의 스승이다나는 새의 제자다 자작나무는 냉대기후에서 자라기 때문에 시베리아 툰드라 지대에 주
허락된 과식나희덕이렇게 먹음직스러운 햇빛이 가득한 건근래 보기 드문 일오랜 허기를 채우려고맨발 몇이봄날 산자락에 누워 있다먹어도 먹어도 배부르지 않은햇빛을연초록 잎들이 그렇게 하듯이핥아먹고 빨아먹고 꼭꼭 씹어도 먹고허천난 듯 먹고 마셔 댔지만그래도 남아도는 열두 광주리의 햇빛! 장대비가 쏟아지는 걸 보니 반갑지 않은 손님 장마가 온 모양이다. 큰 비가 아니면 웬만하면 우산을 쓰지 않는다. 우산이 귀찮기도 하거니와 비 맞는 것도 그리 싫지는 않아서이다. 시골에서 자랄 때는 비 오는 날 비 맞는 것이 일상이었다. 한번은 비 맞고 놀다가
가을하늘을 보며박재삼일년 중 제일로찬란하게 내리는이 햇빛을 송두리째 받고지금 곡식이 팽팽하게여물이 다 든이 빛나는 경치를 보게.거기다 바람까지살랑살랑 어느새찬바람을 거느리고잎새 둘레에 왔네.이런 가을을그 많은 세월 중4분의 1이나 맞이하는 것이얼마나 기특한지 몰라.물 맑고 공기 좋은여기를 피하고도회지로 몰린 사람들아.사람이 살기 편한이 절실한 가을을몸에 붙이지 않고살이 어떻게 찔꼬.섭섭하게아주 섭섭하게가을하늘만 드높이 개었네. 가을이 성큼 다가왔다. 살랑살랑 바람으로 다가오고, 드높이 갠 하늘로 다가오고, 찬란한 햇빛을 송두리째 받
추석 성명진성묘를 간다가시나무 많은 산을꽃 차림 하고 줄지어 오르고 있다맨 앞엔 할아버지가그 뒤엔 아버지가 가며굵은 가시나무 가지라면 젖혀 주고잔가지라면 부러뜨려 주고……어린 자손들은 마음 놓고산열매도 따며산길을 오르고 있다도란도란 말소리가 흐르고그렇게 정이 흐른다산 위에 동그랗게 꽃 줄을 내는 일가족오늘밤엔 꼭 요 모양인달이 뜨겠다 추석날 차례상에 절 한번 하고 잠깐 들렀다 오는 본가와 처가. 아직도 전 몇 장을 부쳐서 가지고 간다. 예전과 많이 바뀌었다. 나 스스로도 전통 방식의 명절 쇠기를 바꾸기 위해 노력했고, 지금은 많이
소금 성자 정일근히말라야 설산 높은 곳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받아물 속에 숨어 있는 소금을 받아내는 평생 노역이 있다소금이 무한량으로 넘치는 세상소금을 신이 내려주는 생명의 선물로 받아소금을 순금보다 소중하게 모시며자신의 당나귀와 평등하게 나눠 먹는 사람이 있다. 누군가에게는 무한량으로 넘치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순금보다 소중할 때가 있다. 넘쳐날 때는 부족할 때를 생각지 못하다 부족하고 나서야 후회할 때가 많다. 돈도, 공부도, 시간도, 인간관계도 그렇다. 넘치기 전에 나눌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나 혼자를 위해 펜스를 높이고 주
가을 엽서 안도현한 잎 두 잎 나뭇잎이낮은 곳으로자꾸 내려앉습니다세상에 나누어 줄 것이 많다는 듯이나도 그대에게 무엇을 좀 나눠 주고 싶습니다내가 가진 게 너무 없다 할지라도그대여가을 저녁 한 때낙엽이 지거든 물어보십시오사랑은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높은 곳보다는 낮은 곳이 좋다. 낮은 곳에는 나누어 줄 것이 많다. 내가 비록 가진 게 없어도 나누어 줄 것이 있다. 나뭇잎도 마른나무에 거름이 되려고 낮은 곳으로 내려앉는다. 가을 저녁 낮은 곳은 고운 소리들로 가득하다. 귀뚜라미 울음 소리, 낙엽 밟는 소리, 개울물 흐르는 소리, 산
누에 최승호누에들은 은수자(隱修者)다. 자승자박의 흰 동굴로 들어가 문을 닫고 조용히 몸을 감춘다. 혼자 웅크린 번데기의 시간에 존재의 변모는 시작된다. 세포들이 다시 배열되고 없었던 날개가 창조된다. 이 신비로운 변모가 꿈의 힘 없이 가능했을까. 어느 날 해맑은 아침의 얼굴이 동굴을 열고 나온다. 회저(壞疽)처럼 고통스러웠던 연금술의 긴 밤을 지나 비로소 하늘 백성의 날갯짓이 시작되는 것이다. 밖에서 구멍을 뚫어주는 누에의 왕은 없다. 누에들은 언제나 자신들이 벽을 뚫어야 하며 안쪽에서 뚫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은수자(
바닷가에서 오세영사는 길이 높고 가파르거든바닷가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보아라.아래로 아래로 흐르는 물이하나 되어 가득히 차오르는 수평선,스스로 자신을 낮추는 자가 얻는 평안이거기 있다.사는 길이 어둡고 막막하거든바닷가아득히 지는 일몰을 보아라.어둠 속에서 어둠 속으로 고이는 빛이마침내 밝히는 여명,스스로 자신을 포기하는 자가 얻는 충족이거기 있다.사는 길이 슬프고 외롭거든바닷가가물가물 멀리 떠 있는 섬을 보아라.홀로 견딘다는 것은 순결한 것,멀리 있는 것은 아름다운 것,스스로 자신을 감내하는 자의 의지가거기 있다 . 바닷가에 왔다.
미아 박준사람들에게 휩쓸려 잡고 있던 손은 놓치고 가방까지 어딘가에 흘리고 그렇게 서로를 잃어버렸을 때 다른 곳으로 가면 안 돼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처음 든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어야 해 네가 나를 찾을 필요는 없어 내가 너를 찾을 거야 최근에 읽은 시 중에 단연 심리를 압도했다. 어릴 때 장이 서는 날 읍내에서 아버지에게 많이 들었던 말이다. 잃어버렸을 때는 돌아다니지 말고 그 자리에 서있으라고. 아버지가 된 내가 아들 녀석 어릴 때 잔소리처럼 했던 말이다. 영화관에서 잠깐 팝콘 사러 갔다 오니 아들은 그 자리에 없었고, 순간 눈앞
풍선여행 채수영하늘에 풍선을 띄웁니다바람 빵빵하게 그리고가볍게 부풀어 거기 작은희망 하나만을 실어도 가득한높이높이 마음을 띄웁니다부풀어 멀리까지뒤따르는 꿈도 좋아라춤추듯 바람을 실어 나르는세상 근심 걱정 사라지는하늘 높이 풍선을 올립니다 풍선은 여행과 잘 어울리는 소재이고, 꿈과 희망을 상징하기에 좋은 소재이다. 화자는 풍선에 꿈과 희망을 실어 세상 근심 걱정 사라지는 하늘 높이 마음을 띄우고, 풍선을 올린다. 동심으로 돌아가는 추억과 이상향에 대한 소망이 과거에 즐겨 불렀던 노래 한곡을 소환한다. '지나가 버린 어린 시절에 풍선을
때죽나무백수인골짜기 흐르는 냇물 가를 따라 숲으로 오르고 있었어요 호랑이가 내려와 놀고 갔다는 너럭바위를 지나 옛 선비들이 돌을 베고 낮잠을 잤다는 바위에 다다르자 어디선가 소리들이 스멀스멀 몸속으로 기어들어 오는 것을 느꼈어요 골짜기 물이 돌 틈을 돌아 흐르는 소리인가 나뭇가지 사이를 빠져나가는 바람들의 발자국 소리인가 숨을 멈추고 자세히 살펴보니 작은 종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내는 하얀 종소리였어요 상큼한 향기가 배어 있는 하얀 종들이 작은 몸을 뒤척이며 내는 가늘고 카랑한 소리였어요그 종소리들이 물에 녹아 흐르면 먼 강에서 수많
여름산 양성우이 산에는 산비둘기 날고저 산에는 뻐꾸기 운다.뭇으로 쏟아지는 뙤약별 스며드는숨 그늘을 따라내 가슴은 초록으로 가득히 물들었으니,혼자라도 나는 외롭지 않구나.땅 위의 모든 것이 우연이면 어떠랴.그칠 줄 모르고 흐르는여울 물소리를 들으며이미 사라져간 것들을 생각한다.그러나 지금은 유난히 넉넉한여름 산골짜기에서,하늘을 가리우는 수천 수만의 잎사귀들이겨울을 미리 염려하지 않듯이나에게는 오늘이 있을 뿐이다. 덥다. 연일 삼십도가 넘는다. 그래도 울창한 숲속으로 들어가면 뙤약볕은 멀어지고, 시원한 바람과 계곡 물소리가 크게 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