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애절양(哀絶陽=양물을 자른 슬픔)을 모두 암송한 뒤 휴- 길게 한숨을 내쉬던 만덕 스님이 독백하였다.
"이것이 과연 시일세. 백성들이 흉년에 고통을 받고 사는디 한가롭게 달과 구름과 강물을 보며 기생을 끼고 술잔을 기울인다는 음풍영월(吟風詠月) 따위가 시인가?"
이응서는 상당한 수준의 글을 배웠으나 시 구절 중 모르는 한자음이 많았다.
"뜻은 어느 정도 알겄는디 어려운 한자들이 많아서 현학성이 엿보이는군요. 어려운 문자를 골라 쓰는 것, 그것이 학자들의 한계 아닌가요?"
"현학성이 아니라 중국 고사나 당송(唐宋) 시절의 고사를 인용하니 어려운 구절이 있네. 그러니께 모르면 배우라고 하지 않던가. 아무리 배우고 또 배워도 진리는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솟아나오이. 시에서 ‘건’이란 한자는 민나라(중국 푸젠성 일대) 말로 자식을 가리키는 말을 표기하기 위해 만들어진 한자네. 송나라 오처후가 지은 청상잡기(靑箱雜記)에는 당나라에서 민나라 자식을 환관으로 만드는 풍습을 풍자하여 고황(顧況)이 지은 애건이란 글자가 나오네. 마지막 ‘시구’란 말은 시경에 수록된 시편으로, ‘뻐꾸기 뽕나무에 앉았으니, 새끼는 일곱 마리라’ 라는 구절로 시작하이. 뻐꾸기는 새끼에게 음식을 먹일 때 항상 일정한 순서대로 공평하게 먹이므로 군자도 이와 같아야 한다는 내용일세."(‘茶山詩選集’ 송재소 역, 일부 인용)
"그렇다면 시란 세상의 불만을 담아야 한다는 뜻입니까?"
"그야 사랑하는 그윽한 마음을 담고, 세상의 아름다움을 담을 수 있네. 하지만 세상이 아름답고 인생은 즐겁기만 한 것이 아니잖는가. 내 곁에 불행한 일들이 즐비한디 외면하고 아름다운 사랑 시만 남길 수 있나. 세상을 보는 눈, 무엇이 옳고 그른지의 판별력을 갖게 하는 것이 시일세 그러므로 다산의 시가 중요하다고 보지. 세상 사람들이 다산의 시를 너무 몰라. 난세일수록 그를 등장시키지 않으려고 한단 말이시. 다산 선생은 관리들의 부패와 독선을 특히 비판하네. 龍山吏(용산리=용산아전)란 시를 한번 보시게."
吏打龍山村 搜牛付官人
아전들이 용산 마을에 들이닥쳐서
소를 뒤져서 관리에게 넘겨주네
驅牛遠遠去 家家倚門看
소를 몰고서 멀리멀리 사라지는 것을
집집마다 문에 기대어 바라보네
勉塞官長怒 誰知細民苦
사또의 노여움만 막으려 하니
어린 백성 고통을 누가 알아주려나(‘정다산 시문선’ 김지용 역주 인용).
"강진의 용산 고을 아전의 횡포를 그린 시네. ‘해남리(海南吏)’도 마찬가지야. 조세 독촉 아전들이 마을로 들이닥쳐서 집집마다 뒤지며 곡식을 착취해간다는 시여."
"그 시도 몇 구절만 읽어주시겠습니까."
그가 다시 시를 암송하였다.
新官令益嚴 程限不得踰
신관 사또 명령은 매우 엄해서 기한을 넘길 수가 없다고 하네
橋司萬斛船 正月離王都
주교사의 만곡선이 정월에 서울로 떠나간다고
滯船必黜官 鑑戒在前車
더 이상 지체하면 모가지가 날아간다고
종전부터 있어왔던 일이라며 경계하며 날뛰네(한국고전종합 다산시문집 제5권)
"주교사(舟橋司)란 조운(漕運)을 관장하고 부교를 놓는 관청이고, 만곡선(萬斛船)은 지방에서 거둔 세미(稅米)를 조창(漕倉)에서 서울로 운반하는 배를 말하네. 이 배에 만선을 이루는 것은 백성들이 어렵게 지은 양곡들이네. 천재지변이 나더라도 어김없이 세미를 거두는 관의 몰인정과 횡포, 그러니 여전히 백성들을 굶주리고, 이러니 나라가 원망스러울 수밖에 없네. 그중 전라도가 더욱 심했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