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콘텐츠 보물창고 광주·전남 종가 재발견
완산대군 후손 박진승 시조
고려 조선 공신·목민관 배출
단종애사에 벼슬 놓고 은거 입향
해남명현 본받을 후진양성 힘써

변함없는 대나무 절개…학덕 높은 선비 가문

부춘재

울창한 수목과 기암괴석이 수려한 해남의 진산 금강산 아래 부춘동에는 해남을 대표하는 ‘해남6현’을 추모하는 해촌서원이 있다. 왜적 침략으로 읍성이 해남과 들판에 급수를 제공하는 저수지인 금강제 앞에 들어서 해남 인재의 산실이 됐던 서원이다. 이 곳에 부춘정사(학당)를 짓고 후학을 양성하며 대를 이어 세거했던 무안박씨(務安朴氏) 해남파 취죽헌공 종가를 찾아 가문의 내력을 살펴본다.

◇박진승 식읍 받아 무안 관향
무안박씨는 신라 경명왕 6째아들 완산대군 박언화의 후손인 박진승을 시조로 모신다. 그는 박혁거세의 34세손이고 박언화의 5세손으로 고려조에 문과 급제해 국자좨주를 지냈다. 그가 나라의 풍속교화에 공을 세워 무안을 식읍으로 하사 받음으로써 무안을 관향으로 무안박씨가 세계를 잇고 있다. 그의 아들 박섬은 안북도호부사 공부시랑, 사재경, 직장감을 거쳐 상서우복야에 올랐다. 박섬은 거란의 침입으로 나주에 몽진하는 현종을 호종했으며 개경 수복 때까지 절개를 지켜 사직을 안정시킨 공으로 삼한벽상공신에 책록됐다.

4세 박승중은 문과 급제해 한림시독학사, 기거사인, 예부낭중, 시강학사, 한림학사지예부사, 정당문학 판한림원사, 참지정사, 중서시랑평장사에 올랐다. 왕에게 시경, 서경을 강의하고, ‘해동비록’, ‘시정책요’를 편찬하고 예종실록을 편수했다. 4세 박유는 정주분도장군, 5세 박성기는 상장군, 밀직부사를 역임했으며, 6세 박부는 밀직부사를 지냈고 삼별초의 난 때 나주목사였다. 7세 박문오(1258~?, 시호는 문정)는 문과급제해 은청광록대부영동평장사에 올랐으며 충열왕 때 홍건적을 격퇴한 공으로 면성(무안)부원군에 봉해졌고 정자 유산정을 짓고 연못 생선지를 축조했다. 그의 동생 박문정은 나주부사를 거쳐 호부상서에 올랐다.

◇임억령 제자 박응백 종가조
10세 박의룡(1330~1430, 호는 풍정)은 고려 말 의주목사를 지내고 이성계와 친교가 두터워 조선 개국에 참여한 공신으로 호조 병조 형조의 판서를 거쳐 영중추부사를 역임했다. 개국공신에게 주는 단서철권을 받았으며 무안 병산서원에 배향됐다. 12세 박형은 지단양군수를 지냈고 그의 아들 박리는 개성부사를 지냈다. 14세 박숭지는 진사시에 입격하고 사헌부지평을 지냈다. 그의 아들 15세 박종정은 참봉을 거쳐 영암군수로 선정을 베풀다가 단종이 선위하자 해남에 은거해 해남 입향조가 된다. 그의 손자인 17세 박안(1504~1560)은 기자전참봉, 숭인전령을 지냈다.

18세 박백응(1525~1587, 호는 취죽헌)은 외숙인 석천 임억령의 문하에서 학문하고 생원시에 입격해 벼슬은 사헌부감찰을 역임하고 부모봉양 편의를 위해 진원현감에 제수돼 효제충신을 높이는 학덕으로 학교를 세우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낙향해 해남읍 해리 부춘동에 강학소로 부춘정사를 건립하고 도의를 강론해 문하에 충의지사를 배출했다. 해촌서원 6현사에 배향됐다. 그의 조카 19세 박사길(1549~1597, 호는 옥강)은 생원시에 입격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죽천 박광전과 함께 보성에서 의병 창의해 임계영의 전라좌의병군에 편성돼 남원, 금산, 무주에서 공을 세웠다. 정유재란에는 의병장 박광전의 선봉장으로 화순 동복전투에서 크게 승리했으며, 순천에서 왜군을 막다가 적탄에 맞아 순절했다.

◇왜란 의병 순절한 임계영 충신
박응백의 아들인 19세 박희길(1546~?)은 생원시에 입격했고 그의 동생 박영길은 통덕랑, 박대길은 예빈시검정을 지냈다. 최부를 주벽으로 박응백 등 해남6현의 신위를 모시는 교육기관이 해촌서원이다. 여섯선생 중 금남 최부는 점필재 김종직의 문인으로 무오사화에 연루돼 유배되고 갑자사회에 참형 당한 유학자로 표해록을 남겼다. 귤정 윤구는 어초은 윤효정의 아들로 최산두, 류성춘과 함께 호남3절로 존경받는 기묘명현이다. 석천 임억령은 눌재 박상의 문인이며 넓은 도량을 가진 문장가로서 담양 식영정에서 고경명, 정철, 김성원 등 가단을 이끌며 수많은 명시를 남겼다. 미암 류희춘은 최부의 외손자, 류계린의 아들, 류성춘의 동생, 송덕봉의 남편, 최산두의 문하, 김인후의 동문인 호남사림의 중심인물로서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됐고 경학에 밝아 선조에게 강론했으며 미암일기를 남겼다. 고산 윤선도는 집권세력을 규탄하는 병진소로 유배되고 모함과 논쟁 등으로 파직·유배를 반복한 문신으로, 효종의 사부였고, 병자 창의 공신이며, 어부사시사 등 명작을 지은 조선3대가인이다. 후손들은 충효의 선비를 추모하는 해촌서원을 보존하며 부춘재를 중건하고 해남6현인 종가조 박응백의 학덕과 절의정신을 계승하는데 힘쓰고 있다.
/서정현 기자 sjh@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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