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콘텐츠 보물창고 광주·전남 종가 재발견
광산 입향 신라왕자 김흥광 시조
성현 본받는 교육 도입한 김양감
성리학 바탕·향약 세운 가문
6행 실천 가통 이어 구휼 앞장

문묘·강학 도입한 선각자 가문

망인당고택 전경. 담양 김선기가옥(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80호)

전남 담양 만덕산이 보이는 구아산 자락에는 공자를 추모하는 강학당을 한반도에 태동시킨 고려 명신의 후손들이 세거하는 대소산마을이 있다. 미암 류희춘과 송덕봉 부부가 살았던 장동마을과 이웃해 서로 교유하며 수많은 인물을 배출한 대소산마을에는 독특한 가옥 건축으로 알려진 망인당고택이 있다. 김선기가옥으로 알려진 종택을 14대째 보존해 온 광산김씨(光山金氏) 문정공후 육행당파 김대기 종가를 찾아 가문의 내력을 알아본다.

◇8대 평장사 배출한 가문
광산김씨는 무진주 광산현(光山縣) 서일동(지금의 담양 대전면 평장동)에 은거한 신라왕자 김흥광을 시조로 모신다. 그의 아들 김식은 신라 각간을 지냈고, 손자인 3세 김길은 사공에 오른 고려 개국공신이다. 그의 후손 김준, 김책, 김정준, 김양감, 김약온, 김의원, 김광중 등 8대가 대대로 평장사에 올라 ‘평장동’ 지명이 유래했고 광산을 본관으로 가문이 번성했다. 5세 김책은 과거 급제하고 좌복야, 한림학사를 거쳐 평장사를 역임했다. 6세 김정준은 좌승선, 중추원사 판어사대사로 지공거를 역임하고, 문하시랑평장사에 올랐다.
7세 김양감은 문과급제해 서북로병마부사, 호부상서를 거쳐 문하시랑평장사, 수태보문하시중감수국사에 올랐다. 그는 태복경으로 송나라에 갔을 때 성리철학인 정자학의 학행과 깊은 뜻을 배우고 태묘와 태학을 도표로 그려와 공자사당을 세우고 문묘를 시작함으로써 고려 성리학 교육의 문을 열었으며 시호는 문안이다. 8세 김약온(1059~1140)은 공손하고 청렴한 문신으로 문과급제해 수태보문하시중판호부사에 올랐다. 그의 동생 김의원(1071~1148)은 국자감 성균시에 합격하고 감찰어사를 거쳐 호부상서 동지추밀원사, 삼사사에 올랐다. 그는 행영병마판관으로 예종 때 윤관의 여진정벌에 참여해 웅주성, 길주성 등에서 공을 세웠고 양주부사로 선정을 베풀었다.
9세 김광중(?~1170)은 과거 급제하고 병마부사, 간의대부 비서감, 상서우승을 역임했다. 서북면병마부사로 있을 때 압록강 하구의 섬에 방수군 둔전을 설치해 금나라와의 국경분쟁의 화근이 됐으나 금나라 황제의 요구에도 처벌받지 않았다. 정중부의 난에 무신들에게 화를 입었고 그 아들 김체가 복수했다고 고려사열전이 전한다.

◇향약·풍속·학문 힘쓴 처사
14세 김태현(1261~1330, 시호는 문정)은 문과 급제하고 벼슬은 우승지, 밀직부사를 거쳐 첨의중찬, 수문관대제학, 상호군 판전리사사에 올랐다. 성절사로 원나라에 갔을 때 고려 충신의 기품을 지켰고, 저서로 동국문감을 남겼다. 그가 문정공파를 열었다. 15세 김광로는 문과급제하고 가안부 녹사를 역임했다.
22세 김처겸(호는 육행당)은 진사시에 합격하고 용양위부호군, 사헌부장령을 역임하고 단종 복위 모의에 가담했으나 드러나자 낙향해 담양 대곡으로 이거했다. 그는 육행당 정자를 짓고 효·우·목·인·임·휼(孝·友·睦·姻·任·恤) 6가지 덕목을 실천하며 학문에 정진했고 풍속 교화를 위해 향약을 세우고 강론했으며 빈민 구휼에 앞장선 효우충신이다. 그가 육행당파를 열었다.
23세 김여휘는 생원시에 합격하고 전생서참봉을 역임했고 기묘사화에 상소를 올려 조광조 구명에 힘썼으며 낙향했다. 24세 김송명은 진사시에 합격해 창평현령을 역임하고 하서 김인후, 면앙정 송순과 교유했다. 25세 김응(1521~1567)은 문장과 학덕이 뛰어나 생원시에 합격하고 훈도를 지냈으며 미암 류희춘과 교유했다.

◇의병창의·벼슬 사양한 의인들
26세 김대기(1557~1631, 호는 만덕)는 소쇄원의 부훤당 양자정과 송강 정철의 문하에서 학문한 처사다. 이괄의 난에 의병과 의곡을 모집했으나 난이 평정되자 완주부에 바쳤다. 인조에게 국난극복 방책을 올리고 건원릉참봉에 제수됐으나 나가지 않았다. 그는 대소산마을에 만덕재를 짓고 경학연구에 전념했고, 만덕문답, 시자손서 등을 남겼다. 그가 종가를 열었다.
26세 김언욱(1545~1596, 호는 서석)은 제봉 고경명의 문인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어가를 호위했고 사평을 제수했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고 낙향했으며 오산창의사에 배향됐다. 그의 동생 김언희(1562~1593)는 임진왜란 때 장성 남문창의에서 활약하고 고종후와 함께 진주성전투에서 순절했고 호남절의록에 올랐다. 27세 김존경(1569~1631)은 문과급제하고 삼척부사로 선정을 베풀었고 탄핵된 적도 있었으나 지중추부사, 경주부윤을 역임했다.
29세 김이귀와 그의 아들 김광수가 생원시에 합격해 가학을 이었다. 종가 안채는 막돌 허튼층쌓기 기단위에 결구 치복기법을 사용한 ㄷ자형 건축물이고 사랑채 망인당은 굵은 아래기둥 위에 루(樓)로 된 당(堂) 형식을 갖추고 계단으로 오르내리는 독특한 건축물로서 가치를 인정받아 전라남도문화재자료 제 180호로 지정됐다. 후손들은 선조가 남긴 유산을 보존하며 육행(六行) 등 정신계승에 힘쓰고 있다. /서정현 기자 sjh@namdonews.com

망인당 현판
망인당
종가 안채
송내재(담양 향토문화유산 제14호)
사당
망인당 와송과 동백나무
문간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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