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콘텐츠 보물창고 광주·전남 종가 재발견
문다성 시조, 문익 중시조
직언상소 가통 이은 충신 배출
부유한 백성 되도록 목화 보급
문집 등 기록유산 가치 확인 필요

‘文’ 이치 깨달아 ‘富民’…문익점 영원히 추모

종가 전경. 보성 율어리고택(국가민속문화재 제156호)

보성강이 율어천과 만나는 전남 보성 율어리에는 진천마을이 있다. 참샘마을이라고도 불리는 이 마을에는 차밭과 대밭에 둘러쌓인 천년송과 돌배나무가 솟아 아늑한 햇살아래 내려앉은 고택이 있다. 남도 고유의 가옥구조와 건축양식 특성을 인정받아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된 이 가옥의 주인공은 남평문씨 집안이다. 진천마을에 터잡아 300여년을 세거한 보성 남평문씨 순질공파 문동윤 종가를 찾아 가문의 내력을 살펴본다.

◇재상에 오른 3형제 가문 중흥
남평문씨는 고려 태사대부 문다성을 시조로 모신다. 그는 전라도 남평 장자지 연못가 높은 바위(문암) 위에서 태어났고 고려 개국에 공을 세워 삼한벽상공신 남평백에 올랐다. 시조탄생설화에 따르면 연못을 지나던 고을 현감이 바위 위에 오색구름이 감돌고 아이 울음소리가 들려 올라가 보니 석함 속에 옥설 같은 아이가 있어 거두어 길렀더니 어려서부터 총명해 글과 사물의 이치를 스스로 깨달았기에 성을 문(文)이라 하고 이름을 다성(多省)이라 했다고 전한다. 남평의 ‘문암’에 보호각을 세워 시조탄생지로 보존하고 있다.
그의 후손 문익(시호는 경절)은 충직한 문신으로 문종 때 문과급제해 요나라에 원자책봉 소임으로 다녀왔으며 좌복야, 서북면병마사, 병부상서를 거쳐 참지정사에 올랐다. 남평문씨는 그를 중시조로 모신다. 그의 아들 3형제가 재상에 오르며 가문을 중흥시켰다. 큰아들 문공인(?~1137)은 문과급제해 송나라에 사은사로 다녀왔고 이자겸에 반대해 유배됐다가 이부·예부상서, 지제고동지추밀원사, 지공거, 중서시랑평장사, 감수국사를 역임했다. 정지상과 함께 서경천도론에 앞장섰다. 둘째아들 문공원(1084~1156)은 문과급제해 낭중으로 금나라에 다녀오고 지공거, 참지정사를 거쳐 서경유수사 문하시랑평장사에 올랐다. 넷째아들 문공유(1088~1159)는 예서에 능한 문장가로서 문과급제하고 장인 한안인의 실각으로 유배됐다가 이자겸이 몰락하자 복직해 금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묘청을 추종한 대신의 배척을 상소하다 좌천됐고 서북면병마사, 보문각학사를 거쳐 예부·형부·병부의 상서를 역임했다.

◇불사이군 충절 이어 의병 활약
문공유의 아들인 3세 문극겸(1122∼1189, 시호는 충숙)은 효우가 깊고 덕망 높은 문신으로 문과급제해 좌정언으로 폐단을 상소하다 황주판관으로 좌천됐지만 선정을 베풀었다. 정중부 난의 화를 면했으며, 이의방의 추천으로 우승선, 어사중승, 용호대장군, 판병부사를 거쳐 권판상서이부사에 올랐다. 유능한 재상으로 문무겸직했으며 명종 묘정에 배향됐다. 남평 장연서원, 김제 저산서원 등에서 추모한다.
10세 문익점(1329~1398, 호는 삼우당, 시호는 충선)은 문과급제해 성균관 순유박사, 좌정언을 역임하고 서장관으로 원나라에 갔을 때 목화씨를 들여와 진주에서 정천익이 시험재배에 성공하게 하고 베 짜는 기술과 함께 보급해 목면재배와 무명사용으로 백성의 생활을 부유하게 하는데 기여했다. 이 사실이 알려져 전의주부, 좌사의대부를 역임하다 공민왕 때 이성계의 전제개혁에 반대해 조준의 탄핵으로 물러났다. 태종은 그 공을 인정해 부조묘(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65호)를 세우고 세종은 부민후에 봉했다. 부조묘는 경남 산청 단성면에 있었으나 봉사손이 끊어지자 철종 때(1854년) 18세손 문병열에게 봉사토록하여 현재의 전남 보성 미력면으로 이설해 영원토록 추모하게 했다.
11세 문중성(1350~?)은 국자진사에 합격하여 한림학사, 합문지후를 역임하고 불사이군 충절을 지켜 은거했다. 그가 충선공 문익점의 둘째아들로서 순질공파를 열었다. 16세 문우창(1482~1574)은 여주목사를 지내고 능주에서 보성 춘정촌으로 입향했다. 20세 문재도(1575~1643, 호는 휴헌)는 정유재란에 참전하고 1603년 무과에 급제해 선전관이 됐다. 이괄의 난에 임금을 호종한 공으로 어모장군, 경주판관, 흥해군수를 역임했다. 병자호란에 남한산성에서 군기시정으로 임금을 지켰고, 경상좌도수군절도사, 용양위 내금위장, 충무위, 오위장에 올랐고 인조로부터 황금연화배를 하사받고 장계를 올렸으며 남한수록, 강도추록 등 일기와 시문을 휴헌문집에 남겼다.

◇고서·종택 보존, 비각은 힘겨워
21세 문희순(1597~1678, 호는 태고정)은 은봉 안방준에게 수학한 성리학자로서 벼슬을 단념하고 낙향해 천황대에 태고정을 짓고 황명처사로서 학문에 전념했다. 그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사촌 문희경과 함께 스승 안방준의 의병군에 참여한 활약으로 호남절의록에 오르고 태고정문집을 남겼다. 그의 손자인 23세 문위하(1661~1751)가 보성 진천마을(참샘마을)에 터잡고 세거를 시작했다. 그의 손자인 25세 문동윤(1738~1788)이 현재의 종택(국가 민속문화재 제156호, 보성 율어리 고택)에 종가를 열었다.
28세 문찬석(1799~1824, 호는 칙헌)은 중병을 얻은 어머니에게 자신의 허벅지살을 베어 노루고기라며 공양하는 독실한 효행이 알려져 나라에서 동몽교관을 내리고 효자비각을 하사했다. 이 비각은 현재 멸실 위기에 있다. 종가는 고문서와 문집 등 기록자료 1천여점을 비롯해 종택과 정원, 효자비각 등 문화유산을 보존하며 선조들의 정신계승에 힘쓰고 있다. /서정현 기자 sjh@namdonews.com

종가 재실
장독대 등
효자 비각
효자 증직 교지
진천마을 우물. 암행어사 박문수가 참샘이라고 극찬했다는 마을 우물.
문익점부조묘 사당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65호)
문익점부조묘 유물관
문익점부조묘 전경
종가 창고
종가 사랑채
효자비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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