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콘텐츠 보물창고 광주·전남 종가 재발견
고흥현 승격시킨 호장 후손
왜구 격퇴한 무장 류탁·류충정
호남명현 철학 담은 장춘정 보존
길이길이 지키는 충효 전통

대자연 이치 깨달아 ‘봄’…장춘정<藏春亭> 가문

장춘정 전경

영산강이 태극 문양처럼 굽어 흐르는 전남 나주 다시면 죽산리에는 죽포라 불린 나루터에 화동마을이 있다. 이 마을 어귀에서 높은 바위를 병풍삼아 맑은 물을 굽어보고 품격 높은 자태를 발산하고 있는 정자가 장춘정이다. 강과 산, 아름다운 나무들에 둘러쌓여 사시사철 ‘생동하는 봄기운을 간직했다’는 이 장춘정(藏春亭)에 걸린 판액의 싯귀와 기문을 통해 자연속에 사유하며 학문의 깊이를 더했던 16세기 호남명현들의 삶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이 마을에서 대대로 장춘정을 지켜온 고흥류씨 만호공후 주부공파 종가를 찾아 가문의 내력을 살펴본다.

◇고려 호장 류영 시조
고흥류씨는 고려 흥양(전남 고흥)호장을 지낸 류영을 시조로 모신다. 6세 류승무는 뛰어난 학덕으로 장흥부 고이부곡을 고흥현으로 승격시켰으며 문하시랑평장사에 증직되고 만종재에 배향됐다. 후손인 류몽인의 ‘어우야담’을 소장하고 있는 만종재와 그의 묘역이 가치를 인정받아 고흥 향토문화유산 제4호로 지정됐다.

7세 류청신(1257~1329, 호는 신암)은 담대한 품성으로 원나라 외교에 기여한 문무겸전의 명신으로 벼슬은 낭장, 대장군, 판밀직사사를 거쳐 도첨의찬성사, 첨의정승에 올랐다. 억류된 충선왕의 환국에 힘써 황제로부터 ‘청신’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아 개명했다. 그는 심왕 왕고를 고려왕위에 올리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원나라에서 머물다 사망했다. 선충동덕좌리익조공신 고흥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영밀공으로 운곡사에서 추모한다. 그의 아들 류유기가 전라도진변만호 판밀직사를 지내고 만호공파를 열었다.

◇외교·국방 공세운 인물 배출
9세 류탁(1311~1371, 호는 성재, 시호는 충정)은 음서로 원나라에 다녀와 감문위대호군에 임명되고 합포만호로 추성양절익조공신 고흥군에 올랐다. 그는 전라도만호를 역임할 때 만덕사에 침입한 왜구를 즉시 추격해 생포하고 포로를 돌려보냄으로써 다시는 침범하지 못했고 좌정승 고흥부원군에 봉해졌다. 홍건적 토벌을 위한 원나라 파병군에 천거돼 염제신과 함께 고우 전투등에서 공을 세웠고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에 오르고 고흥후에 봉해졌다. 홍건적의 침입 땐 왕을 호종하고 흥왕사의 변을 진압한 공신으로 좌정승, 우정승을 거쳐 도첨의시중을 역임하고 공신에 봉해졌다.

14세 류충정(1509~1574)은 무과에 급제하고 부안·강진 현감, 김해·장흥·온성 부사를 역임하고 1555년 을묘왜변이 일어나자 절도사 안위의 참모로 왜적선을 포획하는 공을 세웠다. 그가 나주에 장춘정(전라남도 기념물 제201호)을 건립하고 기대승, 박순, 안위, 양응정, 송순, 임억령 등 호남의 명현들과 교유했다. 그의 아들 3형제가 가문을 빛냈다. 큰아들 류주(1536~1588, 호는 한천)과 셋째아들 류은(1540~1590, 호는 남호)은 형제가 함께 고봉 기대승의 문인으로 학문하고 문과급제해 나주 ‘보산8현’으로 보산정사에서 추모한다. 류주는 사복시정을 거쳐 승정원 좌승지에 올랐으며, 류은은 성절사로 명나라에 가서 태조의 종계에 관한 기록오류를 바로잡고 돌아와 공신에 올랐고 벼슬은 장학원참정, 사헌부지평을 지냈다.

◇정자에 남긴 학덕·의병 정신
류충정의 둘째아들인 15세 류온(1537~?, 호는 정보)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천일 의병장과 함께 의병창의해 활약한 공으로 선무원종공신에 책록됐다. 주부, 행부사과를 지내고 나주 죽산리에 매귤당을 지어 학문에 전념했다. 그가 주부공파를 열었다. 그의 아들 16세 류경승(1563~?), 류경우와 조카 류경현(1560~?), 류경지(1571~?)도 의병으로 활약해 공신록에 올랐다. 18세 류동혁(1620~1657)은 무과급제하고 훈련판사를 지냈다. 그의 사촌 류동필(1632~?)은 무과에 급제하고 병절교위, 행용양위부사과를 역임했다. 25세 류복(1830~1905)은 사헌부감찰을 지냈다. 후손들은 향촌 후학교육의 거점인 보산정사 향약에 참여했고 류증언, 류경, 류증관, 류영규, 류복, 류중상, 류재연, 류극, 류재숙, 류영희 등 효자를 배출했다. 종가는 장춘정을 비롯한 선조가 남긴 유산을 보존하며 정신계승에 힘쓰고 있다. /서정현 기자 sjh@namdonews.com

기대승의 장춘정기문

기대승의 [장춘정기]
천지의 조화는 한 번 숨 쉴 때에도 머무르지 아니하여 오는 것이 무궁하다. 만물이 형체를 가지고 예와 지금에 유행하는 것은 반드시 그러한 소이연의 이치가 있는 것이다. 1년을 가지고 말한다면 봄은 여름이 되고, 여름은 가을이 되고, 가을은 겨울이 되고, 겨울은 또 봄이 된다. 절기가 바뀌고 한서(寒暑)가 교체하면서 생물들의 피어나고 시들며 사라지고 자라나는 것은 형세가 마치 재촉하는 바가 있어서 그러지 않고는 못 견디는 듯하니, 여기에 또한 반드시 그러한 소이연이 있는 것이다. 이 이치를 군자는 찾아보아서 그 마음을 다하고, 소인은 이것을 몰라서 그 생활에 얽매인다. 이것을 모르는 것을 편안히 여기지 아니하여 이것을 찾는 데 이르려고 노력하고, 생활에 얽매이는 것을 불만스럽게 여겨서 진심(盡心)의 도리를 들으려고 노력하는 자가 있다면, 그 또한 가상할 것이다.
전 훈련원 첨정(訓鍊院僉正) 유군 중한(柳君仲翰)이 죽포(竹浦)의 굽이에 정자를 세웠는데, 돌을 베개로 삼고 맑은 물을 굽어본다. 높은 바위가 좌우에 늘어서 있고 무성한 숲이 비치고 있는데, 그 가운데에 아름다운 화목(花木)들을 나란히 심어 놓고는 그 현판에 써 붙이기를 ‘장춘정(藏春亭)’이라 하였다. 그리고 또 정자의 서쪽 노는 땅을 개척한 뒤 작은 집을 짓고 ‘매귤(梅橘)’이라 써 붙였는데, 모두 난간을 세우고 단청(丹靑)을 입혀서 영롱하고 완연하며 아늑하고 상쾌하여 별천지와 같다. 이에 여러 명승지에 대해 쓴 시편(詩篇)을 판각(板刻)하여 편액을 걸고, 아울러 나의 기문(記文)을 걸어 놓으려고 하였다.
나는 군(君)에게 말하였다.
“1년의 봄은 3개월에 그칠 뿐인데 지금 ‘봄을 감추어 보관하였다〔藏春〕’ 하였으니, 여기에 대한 설명이 있겠는가?”
유군이 말하였다.
“그러하다. 4시(時)와 8절(節), 24기(氣)와 72후(候)가 1년 가운데 돌고 있으며 육합(六合) 밖에 나타나고 있는 것을 사람들은 다 측량하지 못한다. 다만 귀로 듣고 눈으로 보아 기억하고 있는 것을 가지고 말한다면, 동풍이 불어 얼음이 풀리면 숨어 있던 벌레들이 비로소 나오는데, 소양(小陽)의 기운이 모두 지상(地上)에 통달한다. 그리하여 복사꽃이 비로소 피고 꾀꼬리가 욺에 이르면, 천지의 원기(元氣)가 가득하고 온갖 꽃들이 꽃봉오리를 드러낸다. 아름다운 숲은 땅에 덮여 있고 꽃들이 울긋불긋 곱게 피니, 산은 마치 단장하여 화려한 듯하고, 물은 마치 담박하여 멀리 있는 듯이 보인다. 한낮의 햇빛은 더욱더 눈부시고 푸른 하늘은 더욱 넓으니, 이것은 바로 봄 한때의 좋은 기회로, 옛사람들이 시름을 잊고 감상했던 것은 진실로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맹꽁이가 한 번 울어 축융(祝融)이 때를 다스리게 되면 지난번 봄이었던 것이 바뀌어 여름이 된다. 그러하니 봄은 진실로 감추어 둘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유독 내 정자만은 그렇지 않다. 기이한 화목(花木)이 무려 수십 종(種)이 모여 있는데, 종류마다 각기 수십 그루가 된다. 그리하여 뿌리가 서려 있고 잎이 맞닿아 있으며, 가지가 어우러져 있어서 붉은 꽃이 지면 흰 꽃이 남아 있고, 청백색의 꽃이 드리워 있는가 하면 노란 꽃이 피어 있으니, 비록 시절이 바뀌어도 꽃이 피는 것은 쇠하지 않는다. 그리고 또한 겨울에도 푸르른 나무가 있어서 처마 가에 푸름을 나타내고 눈 속에서도 꽃을 피우고 있으며, 왕왕 외로운 향기를 풍기는 차가운 꽃이 햇볕에 예쁘게 피어 봄기운을 나타내기도 한다. 이 때문에 내 정자에 들어오는 자들은 항상 봄의 기운이 이 사이에 있는 듯이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의 정자를 ‘장춘정(藏春亭)’이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옛날에 조경순(?景純)이 장춘오(藏春塢)를 만들자, 동파(東坡) 소자(蘇子 소식(蘇軾) )는 〈장춘부(藏春賦)〉를 지어 실증하기를 ‘나이는 조화의 도견 밖에 버리고, 봄은 선생의 장구 안에 있다.〔年抛造化陶甄外 春在先生杖?中〕’ 하였으니, 그 말이 이에 가깝지 않겠는가. 나는 이 때문에 옛사람에게서 증명되는 것이니, 그대는 어떠하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그대의 말은 좋다고 이를 만하나 아직 부족하다. 큰 조화에 따라 추이(推移)함은 형상이 있는 물건으로서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봄은 4월 이후에는 진실로 사라져서 다하니, 어찌 유독 그대의 정자에만 봄을 감추어 둘 수 있겠는가. 비유하면 사람이 나이가 이미 들면 비록 다시 얼굴이 붉고 머리가 검으며 근력이 조금도 감함이 없더라도 그 젊은 기운은 오래전에 이미 변한 것이다. 그런데 마침내 억지로 소년이 머물러 있다고 여긴다면 어찌 잘못이 아니겠는가. 장생(莊生 장주(莊周) )의 말에 이르기를 ‘강 골짝에 배를 감추어 두고 늪 속에 산을 감추어 두고는 견고하다고 이르나, 한밤중에 힘 있는 자가 지고서 달아나더라도 지혜가 어리석은 자는 이것을 알지 못한다.’ 하였으니, 그대가 말한 ‘감추어 두었다’는 것은 이와 유사하지 않겠는가.
봄은 조화의 자취이니, 조화는 무심하여 만물에 맡겨 주고 사사로이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감추어 둘 수가 없는데 하물며 높은 공명(功名)과 부귀(富貴), 풍요로운 금은보화와 곡식ㆍ비단 등으로서 파괴되기 쉬운 물건이며 사람들이 서로 다투는 것에 있어서이겠는가. 그 화려하고 빛나고 많이 쌓아 놓기를 일찍이 며칠이나 하였다고 변하여 먼지가 되고 날아가서 바람이 되어 별안간 삽시간에 없어지고 마니, 굳이 붙잡고 연연해할 것이 없는 것이다. 지난번에 노심초사(勞心焦思)하고 뼈와 힘줄을 괴롭게 하여 급급히 구하고 차지하려고 욕심을 부리던 것이 하루아침에 이렇게 되니, 슬프지 않겠는가. 또 무엇을 감춰 둘 것이 있겠는가.”
유군이 말하였다.
“그러면 어찌해야 하는가?”
나는 대답하였다.
“내 들으니 회암(晦庵) 선생이 일찍이 인성(人性)의 사덕(四德)을 논하면서 하늘의 사시(四時)를 인용하여 증명하였다. 그 말씀에 이르기를 ‘봄에는 봄기운이 생기고 여름엔 봄기운이 자라고 가을엔 봄기운이 성숙하고 겨울엔 봄기운을 간직해 둔다.’ 하였으니, 하늘의 성정(性情)은 비록 원(元)ㆍ형(亨)ㆍ이(利)ㆍ정(貞)에 따라 낳고 자라고 거두고 감추는 등의 각기 다른 명칭이 있으나, 봄이 만물을 낳는 기운은 통하지 않는 곳이 없다. 사람의 성정은 비록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智)에 따라 측은(惻隱)ㆍ수오(羞惡)ㆍ사양(辭讓)ㆍ시비(是非)의 각기 다른 명칭이 있으나, 측은지심(惻隱之心)은 관통하지 않는 곳이 없으니, 사람이 만일 하늘이 우리 인간에게 주신 진리를 알아 돌이켜 찾는다면 감춰 둘 수 없던 봄이 진실로 나에게 있지 않은 적이 없는 것이다. 이에 살펴보아서 그 마음을 다한다면 또한 가능하겠는가, 가능하지 않겠는가.”
유군이 말하기를 “옳다. 옳다.” 하였다.
인하여 위에서 말한 것을 차례로 적어 장춘정 기문(記文)으로 삼는다.
-고봉집 제2권 수록 / 한국고전종합DB 제공 -

장춘정 내부
장춘정 현판
장춘정 풍경
장춘정 판액(사암 박순의 시)
竹暗丹崖一逕開
秋風繫纜訪樓臺
主人今管南邊戍
歸路應摩手植梅
장춘정 판액(풍암 임복의 시)
장춘정 판액(면앙 송순의 시)

[명앙정 송순의 ‘제유부안 충정 매귤당 거나주’題柳扶安 忠貞 梅橘堂 居羅州]
斷盡危崖作勝區 위태로운 벼랑을 다 쪼개 명승구역으로 만들어
憑欄日日送行舟 난간 기대어 날마다 지나는 배를 전송하네
香迷白雪梅經臘 섣달을 지나면 백설인지 매화인지 향기가 헷갈리는데
色奪黃金橘有秋 가을이 되면 귤은 황금빛을 빼앗네
天下更無同品格 천하에 이 같은 같은 품격이 다시 없으니
人間宜得擅風流 사람은 마땅히 풍류를 차지해야 하네
一堂相對開樽處 한 누정에서 서로 마주하여 술동이를 여는 곳에
須記滄浪舊釣주 모름지기 창랑의 옛 낚시 동아리를 기억해야 한다네

장춘정 판액(백호 임제의 시)
장춘정 판액(석천 임억령의 시)
장춘정 판액(절도사 안위의 시)
고봉전서. 고봉 기대승은 ‘장춘정기’를 통해 건립자와 연대 등 장춘정 정보를 기록했다.
장춘정 바위에 새긴 ‘고흥류씨세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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