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콘텐츠 보물창고 광주·전남 종가 재발견
가문 전통 이어 성리학자 배출
경연에 왕도정치 이상국가 강론
14년 유배지에 남긴 성리학맥
유물 보존하고 정신 계승 힘써

호남학풍 일으킨 기묘명현 가문

최산두부조묘
최산두부조묘

전남 조계산과 주암호로 산자수려한 순천 송광면 이읍마을에는 16세기 호남 유학의 르네상스를 이끈 큰 선생를 추모하는 부조묘가 있다. 그에게 학문을 가르친 스승과 그의 제자가 동방18현으로 문묘에 배향될 만큼 성리학 학문 전통의 중심인물이다. 설화 9편이 구전될 정도로 백성의 마음 한가운데 자리했던 인물, 신재 최산두가 부조묘의 주인공이다. 그는 정몽주-김종직-김굉필로 이어지는 성리학 학통을 이어받아 조광조와 더불어 사림의 개혁정치를 추진했던 성리학자다. 그를 중시조로 모시고 17대를 잇고 있는 순천 초계최씨 최산두 종가를 찾아 가문의 내력을 살펴본다.

◇고려 태자대부 최용궁 시조
초계최씨는 고려 태자태부 최용궁(1303∼?, 시호는 문숙)을 시조로 모신다. 그는 전주최씨 시조 최순작의 7세손인 평장사 최경의 아들로 태어나 문과급제하고 대장군, 판사, 참지정사를 역임했으며 충혜왕 복위에 공을 세워 부단사충익대보조공신, 초계군에 봉해지고 태자대부에 올랐다. 그가 경상남도 합천군 초계현을 봉지로 받아 초계를 본관으로 하는 최씨가 세대를 잇고 있다. 2세 최징은 고려 말에 문과급제해 한림학사를 거쳐 찬성사에 올랐다. 3세 최계성은 참판을 지냈다. 4세 최덕강은 호부상서를 역임하고 격변기를 예견해 가솔을 이끌고 개성에서 전남 광양 백운산에 은둔했다. 5세 최성일은 무과급제해 낭중을 역임했다. 9세 최한영(1457∼1520)은 헌릉참봉을 역임하고 광양 봉강 부저리에 입향했다.

◇기묘명현 최산두 중시조
10세 최산두(1483∼1536, 호는 신재)는 막힘없는 기상과 학덕을 가진 기묘명현으로 사림의 정통 계보를 이어 호남학맥을 크게 일으킨 성리학자다. 그는 한훤당 김굉필에게 수학하고 조광조, 김정, 김안국, 김정국, 김식, 김구, 박세희 등과 도학을 강구하는 ‘낙중군자회’에서 도의지교를 맺었으며, 유배지에서 하서 김인후, 미암 류희춘 등에게 성리학을 전수한 호남명현의 스승이다. 그는 14세에 백운산의 백류동 석굴(학사대)에서 주자강목을 공부하고, 18세 때는 순천으로 유배된 김굉필을 찾아가 문하에 들어 4년 후 1등으로 진사시에 입격했다(백패). 스승이 극형을 당하자 천자암에 은거해 9년을 공부한 후 문과급제했다(홍패). 승문원 정자,박사를 역임하고, 경연 강독관에 선발되어 중종조의 도학정치를 통한 개혁을 도왔다. 서장관으로 중국에 다녀와 홍문관수찬, 사간원정언, 사헌부지평, 예조·이조 정랑 등 요직을 거쳤고, 중종으로부터 ‘옥홀’(임금 알현 때 손에 쥐는 물건, 보통 상아·나무 재질이나 옥으로 특별 제작)을 하사받았다. 의정부사인 겸 춘추관편수관으로 역임 중 기묘사화에 연루돼 전남 동복에 유배됐다. 유배 14년 동안 임억령·양팽손 등 선비와 물염정에서 교유하며 화순 ‘적벽’을 명명했고 학관을 열어 후학양성에 힘썼다. 유배에서 풀려나자 모친상을 당해 과도히 애통해 하다 병을 얻어 절명했다. 그는 기준, 박세희, 양팽손과 더불어 경연4학사로 이름 높았고 광양 봉양사, 화순 동복 도원서원(화순군향토문화유산제4호)에 배향됐고, 신재집을 남겼다. 호남 유림의 추천으로 부조묘를 세워 추모한다. 그가 초계최씨 중시조다.

◇유산 전승 충절 계승 힘써
12세 최종원(1552~1621)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곡을 모아 배로 의주의 임금에게 수송했고, 정유재란에는 순천 해룡전투에서 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에 녹훈됐다. 13세 최득린(1594~1659)은 무과급제해 선략장군 선전관을 역임하고, 심기원 역모사건을 진압해 영국원종공신에 올랐고, 벼슬은 통훈대부 행사헌부감찰, 회령도호부판관을 역임했다. 훈련원첨정을 역임할 때 감독관으로 파견돼 장성 입암산성, 담양 금성산성의 개축공사를 완공했다. 둔전도별장으로 농사를 장려하고 어려운 백성을 구휼했다. 그의 아들인 14세 최호립(1615~1678)은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이흥발 의병군에 참여해 청주까지 진군했다가 화의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귀향했으며 통덕랑 등 벼슬에 제수됐으나 나가지 않았다. 15세 최우송은 1650년 경 송광면 이읍마을로 입향했다. 종가와 대종회 문중은 ‘기묘제현수필’(보물 제1197호), ‘기묘제현수첩’(보물 제1198호, 이상 순흥안씨문중 보존), ‘옥홀’(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40호), 신재최선생유허비(전라남도 기념물 제225호)를 보존했다. 최근에는 문중 보존 유물인 최산두 백패(진사 입격교지), 홍패(과거 급제교지) 등 29점의 고문서를 전라남도 지정 문화재로 등록했다. 최산두부조묘, 백류동학사대, 도원서원, 봉양사 등 유산과 500여점의 고문서를 보존하며 구전설화를 수집하는 등 선조가 남긴 정신 계승에 힘쓰고 있다.
/서정현 기자 sjh@namdonews.com

천자암 쌍향수(곱향나무, 천연기념물 제88호). 최산두가 9년 간 공부했던 천자암에 의연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천자암 쌍향수(곱향나무, 천연기념물 제88호). 최산두가 9년 간 공부했던 천자암에 의연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최산두부조묘 외삼문
최산두부조묘 외삼문
최산두부조묘 제실
최산두부조묘 제실
부조묘 현판
부조묘 현판
최산두 초상 / 최길용 초계최씨대종회 사무총장 이미지제공
최산두 초상 / 최길용 초계최씨대종회 사무총장 이미지제공
홍패(최산두 문과급제)
홍패(최산두 문과급제)
백패(최산두 진사입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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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패(최득린 무과급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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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제현수첩(보물 제1198호)의 안처순에게 보내는 최산두 친필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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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이 최산두에게 하사한 옥홀(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4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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