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0일 전일빌딩245 시민갤러리
광주 동구, 흥학관 100년 기념해
연구결과물 발표 자리…출판계획
최명구 등 흥학관 관련인물 34명
사회·독립운동 단체 활동 등 선봬

‘구시청 사거리’라 불리는 광주광역시 동구 광산동 100번지 일대. 이곳에는 일제강점기에 ‘흥학관(興學館)’이라는 건물이 자리했다. 광주의 갑부였던 최명구가 자신의 회갑을 맞아 잔치 비용으로 200여평 부지에 새롭게 건물을 지어 셋째 아들인 최종수에게 내준 공간이다. <남도일보 2019년 8월 15일자 1면·9면>
당시 최종수는 광주공립보통학교(현 광주서석초)의 동창회장직을 맡고 있었다. 동창회는 사회단체가 전무하던 시기, 민족 정신을 부흥시키며 신문·잡지 발행, 강습회, 토론회, 강연회, 정구·축구·야구 등 체육 활동을 통한 청년·학생 인재 양성 등 사회단체 공간으로 흥학관을 사용했다.
흥학관은 일본식 단층 목조건물로 2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강당과 여러 개의 온돌방 등으로 구성됐다. 강당에서는 연극과 음악 공연, 강연, 토론회 등이 진행됐으며 온돌방은 기숙사 역할을 했다. 건물 앞에는 학교 운동장에 해당되는 넓은 공터가 있어 청년·학생들이 축구와 야구, 정구 경기 등을 갖곤 했다.
30년대까지 흥학관은 광주지역 사회단체의 독립운동 본거지로도 활용됐다. 3·1운동의 3대 주축 세력인 신간회 광주지부가 이곳에서 조직됐고,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이끈 광주청년회(현 YMCA)와 성진회를 비롯 노동공제회, 전남노동연맹, 광주청년학원 등이 흥학관을 근거지 삼아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일제강점기 지역 사회운동의 근거지, 항일문화 운동의 본거지 역할을 충실히 한 것이다.

월남 이상재 등을 중심으로 한 조선 교육회의 제안으로 경성에서 조선 민립대학 기성회가 조직되어 ‘한민족 1천만 한 사람이 1월씩’이라는 구호를 걸고 전국적인 모금 운동을 벌였다. 광주에서는 흥학관을 중심으로 조선 민립대학 기성회 광주지부가 결성돼 지금의 조선대학교 모태가 됐다. /광주 동구 제공
최명구의 장남인 최상현(1881~1945)은 흥학관 건물과 부지를 일제 말 광주시에 기부했다. 1960년대 광주시청이 광산동에서 계림동으로 이전하면서 흥학관은 철거됐다. 또 2개 필지로 돼 있던 흥학관 건물터와 주변 토지는 10여개로 쪼개져 개인에게 매각됐다.
현재는 주택과 상업 건물들이 들어서며 정확한 흥학관 건물터가 어디인지도 분간할 수 없는 상황이다. 동구 광산동 100번지가 국내 항일운동사적지로 지정돼 이곳이 흥학관이 있었던 곳임을 짐작케 할 뿐이다. 흥학관 터는 물론 사재를 털어 독립운동을 도왔던 최 부자에 대해서도 후손과 일부 고령자를 제외하곤 아는 사람이 드문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흥학관, 광주사람들’ 타이틀로 기념전시회가 열려 관심을 모으고 있다. 광주 동구(구청장 임택)는 5일 오후 3시 전일빌딩245 3층 시민갤러리에서 ‘흥학관, 광주사람들’ 전시 개회식을 갖는다. 개회식에는 임택 동구청장을 비롯 이병훈 국회의원, 흥학관 설립자 최명구의 후손인 최윤성·최기성·최순 씨, 천득염 한국호남학진흥원장, 조미경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관장, 조광철 광주시립역사박물관 학예실장 등이 참석할 예정이다.
10일까지 이어질 전시는 흥학관 100주년을 기념해 흥학관의 역사 및 관련인물에 대한 연구결과들을 선보인다. 동구는 올해 흥학관 설립 100년을 기념해 흥학관과 관련된 인물에 대한 연구를 매거진U(책임연구원 양성원) 중심으로 올해 5월부터 9월부터 진행됐다.

최명구 선생은 100년 전 자신의 환갑에 맞춰 ‘흥학관’을 완공하고, 흥학관을 광주시민사회에 기부한다./광주 동구 제공

1926년 결성돼 흥학관을 근거지로 활동한 성진회는학생비밀결사 사회과학연구모임으로 광주학생독립운동 중추적인 역할을 맡는다./광주 동구 제공
동구가 연구에 나선 건 흥학관이 근대 광주 정신과 당시 광주사람들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공간이라는 점에서다. 또 흥학관이라는 공간은 사라지고, 기억하는 사람들도 드물지만 흥학관에서 활약했던 광주사람들을 불러내 그들이 추구한 정신이 오늘날 ‘광주정신’의 근간이 되었음을 알리려는 목적도 있다.
실제 흥학관 안팎에서 일어난 일은 당시 광주를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한 밑거름을 제공해줄 만큼 특별하다. 1920-1930년대 광주의 거의 모든 청년단체 활동과 독립운동이 바로 이곳에서 이뤄졌기 때문이다. 조선대학교 모태가 된 조선 민립대학교 기성회 광주지부가 설립된 것도 흥학관이 중심이었다.
전시에는 흥학관을 무대로 활동한 성진회, 독서회, 소녀회, 광주노동야학, 광주청년회 등 당시 사회단체의 사진과 신문 기록물 등이 선보인다. 특히 최명구와 최상현, 최정엽 ‘3부자’와 최석수, 최흥종, 최원순, 서정희, 강석봉, 김용환, 지용수, 김필례, 홍승애, 장석천, 장재성, 문승수, 정남균, 최동문, 김홍은, 장매성, 정우채, 김두채, 박화성, 차마리사, 강해석, 강석원, 신경애, 김용훈, 최형욱, 최현숙, 최한영, 현덕신, 왕재일 김후옥, 주봉식 등 흥학관 설립과 흥학관을 무대로 사회운동독립운동을 한 인물 34명에 대해 사진과 일대기 등을 만날 수 있다.

동구는 이번 연구 결과 전시와 함께 결과물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책으로도 출판할 예정이다.
임택 동구청장은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흥학관은 지금의 광주가 인권 도시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는 토대를 만든 터전 같은 곳”이라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와 후손들이 ‘흥학관’이라는 장소가 가진 의미를 되새기며, 그 옛날 이곳을 오갔던 사람들의 삶에 대해 떠올려볼 수 있길 기대한다”고 전시 의미를 설명했다.
/김명식 기자 msk@namdonews.com /이은창 기자 lec@namdo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