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명규(광주청년정책네트워크 대표)

최근 각종 여론 조사에서 2030세대 부동층이 지속해서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지난 2021년 서울, 부산 보궐선거 이후 대선과 지방선거까지 이어지던 2030세대의 국민의힘 지지가 빠지기 시작한 것이다. 60대 이상은 국민의힘을, 4050세대는 더불어민주당을 지지하는 성향이 강하다면, 2030세대는 어떤 진영도 확실하게 지지하지 않는 부동층 비중이 증가하고 있다. 각종 참사에도 불구하고 현 정부 지지율 30% 선이 무너지지 않는 이유는 지난 선거에서 현 정권을 지지한 유권자 집단, 특히 2030세대의 지지라는 실질적이고 상징적인 자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 윤석열 정부는 주 69시간제도 ‘청년’의 반발을 이유로 철회했고, 일제강제동원피해자 관련 합의도 ‘청년’과 ‘미래’를 빌미로 강행했다. 그러나 이 지지가 빠지고 있다.
하지만 2030세대의 지지 철회가 민주진보진영에 대한 지지로 이어지지 않고 있다. 이것은 누구도, 그리고 무엇도 신뢰할 수 없는 2030세대의 처지를 여실히 드러나는 장면 아닌가 싶다. “새로운 대안? 아니요, 괜찮습니다.” 딱 이 정도가 지금 이 세대의 일반적인 정서 아닐까? 대안인 척했던 민주·진보세력과 새로운 척하고 있는 보수세력에 대한 회의와 냉정한 거부 말이다. 그들은 정치에 대한 값싼 낙관론을 버리고 더욱 차가워지고 있다. 물론 이것이 합리적인 전략인지, 냉소적 태도인지에 대해서는 결론 내리기 어렵다. 여전히 양당은 부동층을 끌고 와야 하는 대상으로만 볼 뿐, 자기반성과 혁신의 계기로 여기지 않는다. 생활세계의 변동과 분리되어 고정된 규칙을 맹목적으로 반복하는 상태를 우리는 무감각이 아니라 체제의 안정성이라 부르고 있을 뿐….
2021년 개봉한 영화 ‘돈 룩 업(Don’t look up)’의 두 주인공 민디(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케이트(제니퍼 로렌스)는 지금 2030세대의 처지와 교묘하게 겹친다. 지구를 향해 다가오고 있는 행성을 최초로 발견한 두 주인공은 종말의 위기가 바깥이 아니라, 내부의 시스템에서부터 이미 시작되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위기 앞에서 미국 대통령은 당면한 선거만 걱정하고, 매스컴은 위기를 알리는 과학자의 외모와 스타성에만 집중한다. 시급한 대책을 촉구하는 진지한 태도는 대중에게 조롱당한다. 초국적 기업의 CEO는 행성에 묻힌 희귀 광물의 경제적 가치를 고려해야 한다며 정부를 쥐고 흔든다. 가짜뉴스가 과학적 사실을 다양한 의견 중 하나로 대체하고 나니, 무엇이 진실인지를 확인하는 방법은 행성이 지구에 가깝게 근접한 순간에 이르러야만 가능하다. 결국 두 주인공은 파국적 상황의 경험을 공유하는 몇 사람과 함께 조용히 종말을 맞이한다. 이런 서사는 비극적이지만 이 영화의 장르는 코미디이다. 이 역설에 어떤 진실이 담겨 있는 것은 아닐까? 총체적 파국의 현실을 포착하는 시대의 감각(시대정신이 아니라)은 애도나 슬픔보다는 희극적 웃음이 더 적합할 것이다.
파국과 웃음의 관계에 관한 오래된 해석이 하나 있다. 철학자 헤겔은 고대 그리스의 희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의 작품을 ‘참된 희극’이라 극찬한다. 그의 작품은 그리스의 신과 공화국, 시민에 대한 조롱 섞인 웃음을 담고 있으나 그것이 예술의 목적이 되지는 않았다. 아리스토파네스는 우스꽝스러운 인물과 비틀린 상황을 통해 참된 국가와 종교, 예술은 무엇인가에 관한 근원적 물음을 제기한다. 세계의 전부라 여겨지던 위대한 신과 국가, 시민적 이상이 거짓이라 밝혀지는 모순적 상황에 직면하면서도 자신의 태연함을 유지하며 자기 주관성 안에서 거짓된 세계의 몰락을 웃으며 극복하는 주체성. 이것이 헤겔이 말하는 참된 희극의 정신이다.
이를 참조하여 현재의 한국 2030세대에 잠깐 투사해본다면 어떨까. 부동층은 더 늘어나도 좋다. 그들은 돌아갈 고향을 버린 사람들, 부채나 책임의 부담 없이 지금과 다른 땅을 끊임없이 모색해야 하는 자유인에 더 가깝지 않을까? 어설픈 타협 없이 “아니요, 괜찮습니다”가 지속하기를 희망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