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재혁(5·18민주유공자유족회장)

올해로 5·18민주화운동이 45주년을 맞았다. 특히 이번 기념일은 대통령 선거를 코앞에 둔 역사적 분기점에서 치러지는 만큼, 더욱 깊은 성찰과 각성이 필요하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민주주의의 뿌리가 어디에 있으며, 공직자들이 국민 앞에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를 다시금 물어야 한다.
1980년 5월, 정권 유지를 위한 군홧발이 광주의 시민들을 짓밟았고, 국가는 국민에게 총칼을 들이댔다. 이로 인해 무고한 생명이 희생되었고, 대한민국 헌정사에는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남았다. 그러나 광주의 시민들은 굴복하지 않았다. 분노와 절망 속에서도 자유와 정의를 향한 항쟁은 계속되었고, 그 피와 눈물은 이 땅 민주주의의 씨앗이 되었다. 우리는 그날로부터 ‘국가는 국민 위에 군림할 수 없다’는 교훈을 얻었으며, 그 정신은 지금도 살아 있다.
하지만 오늘날 대한민국은 또 다른 민주주의의 위기 앞에 서 있다. 윤석열 정권 하에서 드러난 계엄령 문건과 쿠데타 기도 정황은 헌법의 근간을 뒤흔드는 내란적 상황이었다. 이는 단순한 정권 유지를 넘어, 민주공화국의 근본을 부정하는 행위였다. 그뿐만 아니라, ‘북한군 개입설’과 같은 역사왜곡은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이미 거짓으로 판명된 주장을 반복하며 시민의 희생을 조롱하고, 역사의 진실을 부정하는 자들이 아무런 제재 없이 활동하는 현실은 민주주의의 건강성을 위협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5·18기념식은 단순한 과거의 추모가 아니다. 그것은 민주주의의 가치와 책임을 되새기고, 우리가 다시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를 묻는 이정표이다. 특히 헌법 전문에 5·18정신을 수록하고, 역사왜곡처벌법과 민주유공자 예우법을 제정하는 일은 더 이상 정치적 요구가 아닌 시대의 사명이다.
그런데 정작 이러한 숭고한 자리에 대한민국의 권력 핵심은 철저히 외면하고 있다. 대법원장을 비롯해 국방부 장관, 경찰청장, 검찰총장, 국정원장, 감사원장 등 권력기관 수장들은 단 한 차례도 공식 기념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사법부의 수장인 조희대 대법원장조차 임기 내내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는 단순한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민주공화국의 정신과 헌법 수호라는 공직자의 책무를 회피한 태도이다. 권력자의 외면은 침묵이 아니라, 사실상 묵시적 동조로 해석된다.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는 말이 있다.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낫다는 뜻이다. 1980년 5월, 이 땅에서 실제로 벌어졌던 국가폭력의 현장을 직접 보고, 느끼고, 기억해야 진정한 책임을 말할 수 있다. 5·18기념식은 의전이 아니라 산 교육의 장이며, 정의와 인권의 가치를 되새기는 자리이다. 미래세대에게도 민주주의의 참모습을 교육할 수 있는 살아 있는 교과서가 된다.
실제로 세계 곳곳에서 민주주의의 위기를 겪는 나라들이 한국의 5월을 배우기 위해 광주를 찾는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5·18기록물은 국제 사회가 인정한 민주주의의 교과서이자, 대한민국이 세계 속에 우뚝 선 증거이다. 우리는 이 위대한 유산 앞에서 겸허해야 하며, 그 정신을 계승하는 책임을 져야 한다.
법을 세우고, 안보를 지키며, 정보를 통제하는 이들이야말로 누구보다 먼저 그 자리에 서야 한다. 권력은 특권이 아니라 책임이고, 권위가 아니라 봉사다.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과 역사 앞에서의 겸손이 없는 권력은 언제든 국민을 위협하는 폭력으로 변질될 수 있다.
이제는 침묵의 시대를 끝내야 한다. 제45주년 5·18기념식은 권력기관장들이 진정성 있는 행동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보여줄 마지막 기회다. 단 한 번의 걸음이 수많은 외면을 뒤엎고, 국민 앞에 책임지는 공직자의 자세를 증명할 수 있다.
침묵은 외면이며, 외면은 곧 공범이다. 진정한 정의는 말이 아니라, 행동과 용기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그 용기는 바로 지금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