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욱은 다리가 후둘거리는 몸을 간신히 추스르며 청와대를 나왔다. 이게 꿈인가 현실인가. 도무지 현실같지가 않았다. 그가 반체제 인사, 학생들을 잡아들여 다구리할 때, 박정희는 흐뭇해하며 격려하지 않았던가. 혹 그가 정적들을 잡아들이는 것을 미적거릴 때 박정희는 “그자와 내통하고 있나?”하고 의심했었다. 그런 사사로운 인정에 무너질 사람이 아니라는 걸 확인시켜주기 위해 실제로 개인적 연분이 있는 사람도 잡아들여 인정사정 볼 것없이 잡아 족치지 않았던가. 그런데 과격하게 다뤄서 자기 체면이 말이 아니라고? 이런 씨발놈, 하고 마음 같아서는 한번 받아버리고 싶었지만, 숙주(宿主)에게 대들 수는 없었다. 언감생심 그런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김형욱은 남산 중정으로 돌아가는 차안에서 후임 중정부장에 이후락이 발탁되었다는 라디오 방송을 들었다. 김형욱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것으로 끝인가. 그러나 그럴 수는 없었다. 그가 재빨리 운전기사에게 명했다.

“회현동 화원으로 차를 돌려라.”

그를 지켜줄 최후의 보루는 미국이다. 그런데 운전기사가 다르게 말했다.

“사무실로 돌아가서 마지막 고별 인사를 해야 하지 않을까요?”

“뭐야 새끼야? 돌리라면 돌려!”

라디오 발표를 보고 운전기사도 그에게 대드는 것 같았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같은 길을 계속 뺑뺑이 돌려도 토를 달지 않던 운전기사마저 그를 업신여기는 것 같다.

“돌리라면 돌려!”

“알겠습니다.”

운전기사가 삼일로 고가도로에서 내리막길을 타더니 회현동으로 차를 돌렸다. 김형욱은 두고두고 분이 안풀렸다. 생각할수록 억울하였다. 그를 보호할 후견인은 국내엔 아무도 없다는 데 절망하였다. 도처에서 권총을 겨누고 달려드는 것 같다.

“이 새끼들아, 내가 호의호식하자고 이런 줄 알아?”

그는 항변했으나 돌아오는 것은 싸늘한 밤바람 뿐이었다. 따지고 보니 과연 그는 중앙정보부장으로서 권력을 휘두르는 과정에서 너무 많은 사람을 다치게 했다. 박정희 장기집권을 위해 피아를 구분하지 않고 뭇 사람들을 조졌다. 김일성 집단의 남침 기도를 앞세워 간첩으로 몰아 체포하고, 여야 구분없이 정치 공작을 벌여 정적들을 제거했다. 당한 그들이 일제히 총과 칼을 겨누며 대드는 것 같다. 그렇다고 그가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 모든 것은 박정희 권력을 뒷받침하기 위한 조치였다. 박정희의 재가와 묵인 아래 이루어졌다. 그 과정에서 사람이 다쳤을 뿐이다. 그가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빽 고함을 질렀다.

“개자식들아, 나 살자고 이랬던 거야? 모든 것이 박정희 대통령 각하를 위한 충성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단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빌미가 되어 해임된다고?”

운전기사가 흘깃 뒤를 돌아보았다. 이 새끼, 너도 이젠 별 수 없어, 하는 듯이 시쿤둥한 태도로 앞을 바라보고 차를 몰았다. 김형욱은 내내 박정희에게 심한 배신감과 모욕감을 느꼈다. 그는 속으로 “두고 보자, 토사구팽의 후과가 어떤 것인지를 내 똑똑히 보여주겠어” 하면서 화원으로 들어섰다.

“송마담, 긴한 용건이 있어서 왔소.”

김형욱은 송안나와 마주 앉자 박정희가 즐겨마시는 시바스리갈을 시켜 맥주잔에 가득 따르더니 단숨에 벌컥벌컥 마셨다.

“왜 이러셔요? 무슨 불쾌한 일이 있었나요?”

송안나는 김형욱이 중앙정보부장 직에서 해임된 것을 아직 모르고 있었다. 김형욱은 자기 의중을 말하지 않고 물었다.

“타일러 장군으로부터 소식이 없소?”

“글쎄요. 그러니까 왜 무슨 일이 있었냐니까요?”

“천하에 없는 오입쟁이 박정희를 고발하려구.” 하고 말하려다 김형욱이 다르게 말했다.

“타일러 장군에게 건의할 말이 있소.”

그는 분이 안풀리는지 또다시 시바스리갈을 맥주잔에 자작으로 가득 부어 벌컥벌컥 마셨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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