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안나가 다시 말했다.
“내 다시 한번 말하는데, 김형욱 저 사람, 이제 국내에 설 자리가 없어요. 어찌 보면 불쌍하고 가련한 사람이죠. 죽은 사람이니까요. 헌데 죽은 사람을 살려낼 방법이 있어요.”
“살려낼 방법이 무엇입니까?”
“각하의 총애를 영원히 받을 줄 알고, 각하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을 해도 된다고 오만을 부렸지만, 각하는 이용해먹고 걷어차버렸죠. 무식하고 우직한 자는 씹다가 짜증나면 뱉어버리는 추잉검 신세를 몰라요. 하긴 자기 자신도 권력의 맛에 흠뻑 취했으니까 그 자리가 영원할 줄 알고 건방을 떨었겠죠. 하지만 최고권력자는 충복들을 경쟁시켜 놓고, 상호 견제하도록 하고, 뒤에서 줄을 당겼다 놓았다 하면서 즐기죠. 하수인들은 그런 속성을 모르고 교만하기만 하죠.”
키 큰 청년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뜻인지 감이 잡힌다는 태도다.
“김형욱씨는 지금 미국으로 튈 생각을 하고 있어요. 왜 그러는 줄 알아요?”
“추적을 받기 때문이겠죠. 특히 민주화운동 투쟁가들에게…”
“당신들은 아녜요. 그가 이 땅에 송곳 하나 박을 땅이 없다는 것을 느끼는 것은 당신들 때문이 아니라 내부의 적들 때문이에요. 그의 적은 권력 내부에 있어요. 투옥되고, 때로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사람들의 가족들이 원한을 품는다고 해도 그들은 힘이 없죠. 양심과 정의에 빗대 역사의 심판대에 세운다고 하지만, 그건 패자들의 자기 위안 넉두리밖에 안돼요. 권력 내부의 파위 그룹들은 그런 그들을 사람 취급도 안한다니까요. 독재 타도를 외치는 사람들을 잡아가두고 고문한 것이 그들의 이편 저편 가릴 것없이 치적으로 평가되어 왔으니, 당신들은 그들의 공로를 세워주는 도구에 지나지 않아요. 그러므로 당신들은 하찮은 존재일 뿐이에요. 민중들이 들불처럼 일어난다고 하죠? 하지만 그들은 그 들불이 크게 번지도록 방치했다가 어느 순간에 싹 짓밟아 꺼버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면서 자생력을 회복할 때까지 시간을 벌죠. 그리고 다시 들불처럼 일어나면 똑같은 방식으로 짓밟아 꺼버리죠. 그런 악순환이 거듭되면서 그런 역할을 한 자들이 영전과 승진을 통해 권력의 심부로 들어가요. 그렇게 해서 기득권을 형성하고, 그들 자식들까지 세습되어 어느새 사회의 주류를 형성하게 되죠. 일제 강점기부터 행해진 전통이에요.”
양심적인 인사들을 체포, 구금, 투옥시키는 것은 그들의 치적을 높여주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꿈을 깨라는 것이다. 이런 패배주의도 있나? 하지만 반드시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나서는 운동인가. 아니다. 그 시기, 그 공간에 서있기 때문에 실존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뿐, 승리는 부차적인 것이다. 그런데 송안나는 힘의 한계를 말하고, 패배주의를 경계한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거는 당신들 힘으로는 어림없다는 거예요. 김형욱이란 사람이 당신들에게 몹쓸 짓을 했지만, 제거만이 전부가 아니에요. 더 크게 써먹을 수 있다는 걸 말하는 거예요.”
“그렇더라도 저런 자를 내버려두면 악마를 더욱 키워주잖아요. 관용과 용서는 악마에게는 해당되지 않아요. 오늘의 악을 용서하면 내일의 악에 더 용기를 주지 않나요?”
“투쟁은 당신들만의 전유물이 아니에요. 민주화를 앞당기기 위해선 오히려 저런 사람의 힘이 필요해요. 경우에 따라서는 그들의 힘이 더 큰 자원이 될 수 있어요. 당신들이 견고한 독재의 벽을 허문다고 해도, 저런 사람들의 총 한 방에 미치지 못할 수 있어요.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의 이익을 획득할 수 있는데, 왜 꼭 한가지만을 고집하나요? 당신들 혹시 트리거 이론이라는 거 아세요?”
“트리거라면 방아쇠 아닙니까?”
그들은 송마담이 결코 범상한 여자가 아니란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요. 트리거란 사건의 반응을 유발하는 도화선이란 걸 뜻해요. 방아쇠를 당길 때 총구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 얼핏 방아쇠를 당긴 자가 연막속에 감춰지는데, 그러나 그것이 일으키는 연쇄반응은 엄청나죠. 역사 진전의 기회가 되기도 하고, 비참한 역사 퇴행의 길로도 갈 수 있죠. 어쨌든 억눌린 을의 울분을 자아내는 분노가 방아쇠를 당기게 하는 힘이 되는데, 그건 권력의 자장력이 가까운 곳에서 쉽게 나와요. 멀리서는 탄착점에 이르지 못하고, 또 노출되기 십상이죠. 그럼 적임자가 누구겠어요?”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