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욱이 테러를 당했다면 도하 신문에 이 사건이 대대적으로 보도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신문도 보도하지 않았다. 누가 보아도 의도적인 테러 사건이고, 그런데도 보도되지 않은 것은 누군가 사건을 숨긴 것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보이지 않은 손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암시해주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그는 이 사건으로 확실히 권력의 주변부로 밀려난 것을 증명해주었다. 그렇다고 그의 죄과가 사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보복의 발톱이 더 드세게 드러날 뿐이었다.

며칠 후 문리대 학생회실에서 회의가 열렸다. 이동건이 회의를 이끌었다.

“김형욱은 우리 학생들과 민주 인사를 탄압하고, 간첩 조작을 해서 많은 사람을 다치게 했지. 때문에 응징해야 할 우리의 적이자 청산해야 할 악마야. 그는 엉뚱하게 권력에 대한 배신감으로 복수를 꿈꿀 거야. 그런 그를 우리가 협력자로 끌어들이면 어떻겠나. 우군으로 만들자는 것이지.”

4학년 홍상표가 나섰다.

“그건 아니지. 그놈 이용할 가치도 없어. 우리의 도덕성만 상처를 주게 돼. 적으로 간주해 우리가 선빵을 날려버려야 해. 우리가 죽지 않았다는 점을 명시적으로 공표할 필요가 있어. 그러면 권력에게도 경종을 울리는 거고…”

“시체에 칼질하는 것 아냐?”

“시체에 칼질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가 살아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거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라는 것이지.”

그러면서 그는 새삼 김형욱의 잔혹성을 열거했다. 야당 국회의원을 매수 회유 협박하고, 베를린 간첩단 사건, 임자도 간첩단 사건, 노동자 탄압 등 공안사건은 개입하지 않은 사건이 없었다. 이런 것들로 인해 북한은 그를 암살 1호로 지목했다. 이것이 역설적으로 정권의 신임을 받는 공로자가 되었다. 박정희 정권이 위기에 직면할 때마다 김형욱은 대형 간첩단 사건을 발표했다. 공포사회를 만들고, 권력 유지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동건이 말했다.

“박정희 종신 집권의 밑자락을 깔아준 것이 3선 개헌이야. 후계자를 노리던 JP 계열이 반발하자 김형욱이 잔혹하게 짓밟았지. 김형욱은 JP와 함께 육본 정보국에서 함께 근무했으니 막역한 친구 사이야. 그런데 어느날 아침부터 그의 집을 도청하고, 드나드는 인사들 명단을 체크하고, 그런 세력들을 체포해 아작을 냈지. 그래서 그 사람들이 이번에 테러를 감행했을 개연성이 높아. 그러니 우리가 그를 칠 이유는 없다고 봐. 이렇게 다른 세력들이 그를 제거할 거야.”

남궁현일이 나섰다.

“박정희의 영구집권을 도와주는 길을 튼 죄악상에 대한 책임을 묻자는 것이 중요합니다. 대한민국 정치 질서를 파괴한 자로 처단해야지요.”

그러자 이동건이 이의를 제기했다.

“그건 전적으로 그의 책임이라고 볼 수 없지. 박정희의 개로 살았으니까 최종 책임은 박에게 있는 거야 그의 죄가 가벼운 것은 아니지만 그는 하수인에 지나지 않아.”

“하지만 행동대장으로서 권력을 무자비하게 사용했습니다. 그 결과 공화당 의원들이 모두 등을 돌렸습니다. 어떤 의원은 축첩 때문에 모욕을 당했고, 어떤 의원은 간통 현장이 잡혔습니다. 비리로 묶이고 구속된 자도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부정과 비리에 가담한 것은 약과죠. 군납비리에서부터 건설 수주를 봐주는 조건으로 수주액의 30%를 삥땅 뜯는 것은 관행처럼 되어서 웃고 넘어갈 정도니까요. 하지만 간통 강간 행위는 사회적 통념상 용납되지 않으니까 패가망신하고 정치생명을 끊기는 것이나 다름없었죠. 그 짓을 그자가 아무렇지 않게 했다니까요.”

“이런 못된 짓을 했다는 것은 그만큼 적을 많이 만들어냈다는 것을 의미하지.”

대화는 개미 쳇바퀴 돌듯하였다. 이동건이 단안을 내렸다.

“김형욱을 만날 수 있나? 남궁현일이 한번 만나볼 수 있겠나? 그를 유신 반대의 전사로 돌려놓으면 훨씬 의미있는 일이 전개될 것같아.”<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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