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화를 듣고 있던 김형욱이 불쑥 내뱉었다.
“나는 미국에 갈 자격이 있소. 내가 미국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공적을 세웠나. 코호트씨가 무기상이기 때문에 하는 말인데, 내가 전투기, 탱크, 군함, 미사일 등 미국 무기를 얼마나 많이 사들이도록 했나. 북한 공산집단을 타격하기 위한다고 했지만, 사실은 미국을 위해 무기를 사들인 것이오. 이렇게 해서 과도하게 군비확장에 나선 것도 사실이오. 그런 나의 노력을 인정해야 할 것 아닌가?”
코호트가 대답했다.
“그 점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생각을 달리합니다. 한국의 재야세력, 학생세력과도 접촉한 결과입니다. 양심적인 지식인이나 야당 정치세력을 용공 프레임을 씌우는 것으로 지배세력이 벌어먹었던 것은 지탄받아 마땅합니다. 그 중심에 김부장이 있었습니다. 체제 유지를 위해 폭력적이고 잔인한, 억압적 권력으로 군림한 데 대해서 미국은 용인하지 않습니다. 남북 극한 대치와 호전성의 중심에 귀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은 인권 문제도 중시합니다. 군비증강은 평화를 사기 위해서지, 전쟁이 목표가 아닙니다. 그런데 한국 군부는 전쟁을 하겠다는 데 목표를 두고 있습니다. 지금 김부장이 미국으로 떠나겠다고 하는데, 이는 코드원(code 1)이 반대하고, 공화당에서도 반대합니다. 야당도 반대하고 국민들도 반대하고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처음 봅니다. 그 이유를 모릅니까?”
김형욱이 화난 표정으로 양주를 병째 벌컥벌컥 마셨다. 그는 막다른 골목에 내몰렸다는 절박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남궁현일이 나섰다.
“부장님은 박정희 정권의 철권통치 독박을 쓰고 있습니다. 권력의 중심부에 있는 사람들은 품성 자체가 기회주의자들입니다. 그걸 잘 간파해야 합니다. 이용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미중 외교 협상 타결 이후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은 데탕트로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장님은 이용가치가 없어진 것입니다. 오히려 악인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이 새끼, 니가 뭘 한다고 씨부리는 거야? 당장 나가지 못할까?”
무슨 뚱딴지 같은 말이냐는 듯이 김형욱의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 일그러졌다. 김비서가 손사레를 치며 말렸다.
“부장님, 지금은 화를 내실 때가 아닙니다. 저 학생이 코호트와 함께 왔다면 부장님을 도울 우군으로 받아들이고, 어떤 말이 나와도 경청하십시오. 일면 틀린 말도 아니잖습니까. 무엇보다도 부장님의 미국행을 도울 수 있는 신분들이라는 점을 고려하십시오.”
김형욱이 체념한 듯 소파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니놈들이 북한의 야욕을 몰라서 그래. 그놈들이 얼마나 광기에 사로잡혀 있는데…”
코호트는 한국의 군사엘리트들이 반정치주의에 매몰되어 있다고 여기고 있었다. 북한을 증오하지만 북한 체제를 너무도 똑같이 닮아가고 있었다. 군사정권의 변형된 체제인 유신정권은 그들의 반정치주의에 재벌·관료·검찰·언론 등 기득권 세력을 우군으로 편입시켰다. 아니, 그들이 먼저 가세했다고 보아야 한다. 그들은 불의하고 부도덕할지라도 이익이 있는 곳에 기생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부역하면서 빵부스러기를 얻는다는 것은 일제강점기부터 학습해온 생존의 방식이다. 그래서 권위주의 정치는 기득권 세력의 이데올로기로 자리잡는 데 큰 힘이 되었다. 민주화가 이루어지면 비용이 많이 드는 데 비해 파쇼세력과 결합하면 손쉽게 이익을 편취하고 군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구조에 대부분의 국민들은 세뇌되게 된다. 지적으로 무지한데다 사물 판단 능력이 결여되어서 맹종하는 식민지 멘탈리티를 유지하는 것이다. 언론의 일방적 정보 주입으로 그것은 더욱 강화된다. 어느 면에서 보면 그들이 오히려 나라의 민주화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된다고남궁현일은 판단한다.
“부장님, 외람된 말씀이지만 진정으로 몇마디 말씀드리겠습니다. 권력을 위해 속된 말로 사냥개가 되었지만 지금 여지없이 팽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선 더 이상 발을 붙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언제 변을 당할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미국에서의 역할을 생각해보십시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