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주년 기획기사 ‘오월 10일간의 항쟁 이야기’
③위성삼(25·대학생)
당시 도청 내 총 경비대장 역할 담당
“어쩔 수 없었다”…무기 탈취 강행
故윤상원 열사와 함께 총기교육 나서
‘인간 도살장’…참혹했던 수사 내용도

43년이란 시간이 흘렀지만 5·18민주화운동은 여전히 ‘아픔’이란 또 다른 이름표를 달고 있다. 민주화를 위해 목소리를 높였단 이유로 국가가 휘두른 총칼에 광주시민들이 힘없이 쓰러졌지만 누구하나 나서 책임을 지려 하지 않아서다. 당시 책임자였던 고 전두환은 천수를 누리고 떠나면서 이젠 원망의 대상마저 사라졌다. 그래서 더 멈출수 없다. 실체적 진실을 향한 발걸음이 멈춘다면 목숨을 바쳐 민주화를 수호한 오월영령들에게 또 다른 의미의 죄를 짓는 것이기 때문이다. 남도일보는 앞으로 5·18민주화운동의 진실이 규명될 수 있도록 모든 이들과 함께 하려 한다.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경험한 다섯분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담아내 흩어진 진실의 조각을 맞춰나갈 것이다. <편집자주>
“1980년 5월 19일 오전 동구 금남로. 총을 등에 메고 손에 곤봉을 든 계엄군들이 쫓아왔다. 붙잡힌 사람들은 계엄군 서너 명이 달려들어 곤봉으로 닥치는 대로 때리며 사정없이 발로 걷어찼다. 이것도 부족해 쓰러진 사람들을 군홧발로 짓밟기 시작했다.”
당시 25살의 대학생 신분으로 광주 수호에 함께했던 위성삼씨의 증언이다.
위 씨는 ‘사람이 어떻게 저럴 수가 있을까?’라는 울분을 삼키며 시민군에 합류했다.
참혹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21일 오후 2시 30분께. 위 씨는 버스를 타며 광주의 현실을 알리기 위해 나주로 향했다.
위 씨는 “나주로 향하던 도중 뒤에서 시위대들이 탄 군인 지프차가 와서 버스를 세웠다. 영문도 모른 채 차를 세웠고 지프차에는 카빈 총을 든 사람들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공수부대가 오후 1시께 도청 앞에서 발포를 해 시민들이 많이 죽었다는 소식을 우리에게 전했다”며 “그 말을 듣는 순간 끓어오르는 분노와 함께 우리에게도 무기가 있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끼게 됐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위 씨는 “당시 무기고에 간 것은 잘못됐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광주·전남을 지키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밝혔다.
버스는 곧장 나주경찰서로 향했다. 경찰서는 텅 비어 있었고 무기고는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고 전했다.
위 씨는 “무기고를 부셨더니 공기총과 권총, 카빈총이 있었다. 나주경찰서엔 총 밖에 없어서 총알을 구하기 위해 나주 금성동 파출소로 향했다”고 이야기했다.
이들은 파출소에서 탄알과 수류탄을 챙겨 시민군들에게 총알과 수류탄을 배분하고 광주로 향했다.
이후 25일 위 씨를 포함 30여 명의 학생들은 동구 YWCA에 모여 도청에 상주하자는 의견을 모았다. 위 씨는 당시 대표 5명 중 1명으로 선출됐다.
도청에 들어간 위 씨는 당시 수습대책위의 제안에 따라 도청내 총 경비대장을 맡기로 했다.
위 씨는 “당시 경비대장을 맡으며 무기를 통제하고 시민들이 불안해하지 않도록 독려했다”며 “이날 故 윤상원 동지와 YWCA에서 80여 명의 학생들에게 총기 설명, 다루는 법 등을 가르쳤다”고 회상했다.
27일 도청이 계엄군에 함락당하고 위 씨를 비롯한 시민군들은 상무대 합동수사본부로 이송됐다.
위 씨는 합동수사본부를 ‘인간 도살장’이라고 표현했다.
위 씨는 “헌병들이 옷을 벗기고 얼차려를 반복했다. 내 호주머니에서 실탄 하나가 나오자 내 입에 실탄을 물리고 사정없이 뺨을 때렸다”면서 “이빨이 다 깨지는 것 같았다. 무엇을 조사한다기 보다는 두들겨 맞는 일이 더 많았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조사에서 구타로 이어지는 일상이 반복됐다. 조사관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으면 무조건 폭행했다”며 “조사관들이 원하는 대답은 ‘총을 쐈다’라는 대답이었다”고 말했다.

위 씨는 그렇게 여러 날을 버티다 모진 고문을 못 이기고 입을 열었다고 말했다.
위 씨는 “4일 동안 총을 쏘지 않았다고 버텼다. 하지만 결국 말할 수밖에 없었다”면서 “나를 구석에 무릎을 꿇리고 등 뒤에 의자를 놓고 머리를 뒤로 젖혀 잡아당겼다. 그리고는 곤봉에 청소걸레를 감아 입에 쑤셔 넣고 물 주전자로 코에다 물을 붓는 고문을 계속 진행했다”고 설명했다.
위 씨는 계엄법위반 및 내란 부화수행으로 1심에서 5년 구형에 실형 2년 6개월을 선고받고 지금까지 민주화를 위해 헌신하고 있다.
위 씨는 “계엄군에 맞서 싸우다 희생된 많은 동지들은 안타깝게 죽음을 맞이했는데 나는 살아있지 않느냐. 너무 부끄럽다”면서 “지금까지 5·18민주화운동을 위해 한 청춘을 바치고 있는 것은 죽음을 맞이한 동지들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서다”고 토로했다.
/이현행 기자 lhh@namdo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