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말 홍건적 침입시 공민왕 호종한
장흥백 고중연이 ‘제주고씨’에서 분적
장흥·담양 등에 집성촌 형성해 살아
임진왜란 때 의병장 고경명과 두 아들 순국
선조, 사당에 ‘포충’ 사액 삼부자 기려

 

 

광주광역시 남구 포충로 767에 자리한 포충사 전경.

오는 17일은 제85회 순국선열의 날이다.

‘순국선열의 날’은 국권 회복을 위해 헌신한 순국선열의 독립정신과 희생정신을 기리고자 제정됐다. 1939년 11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임시총회에서 순국선열공동기념일로 제정된 것이 그 시초로, 1997년부터 정부 주관 행사로 거행되고 있다.

나라가 외침(外侵)이나 내란으로 인해 위태로울 때 충렬지사는 호남 출신이 많았다. 특히 고려 말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약 700년에 걸쳐 ‘호국 명가(護國名家)’로 일컬어지는 장흥고씨 가문이 가장 대표적이다.

이에 남도일보는 조선시대에서부터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호국 정신을 이어온 장흥고씨 가문의 인물과 그들의 애국적 활동을 3회에 걸쳐 게재한다.

1회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활약한 고경명과 그의 후손들이 이어온 충렬한 가문의 역사를 조명한다.

2회에서는 일제침략기에 호남의병을 이끌었던 고광순의 삶과 그의 순국 과정을 다룰 예정이다.

마지막 3회에서는 일제강점기 동안 비밀 독립운동 단체인 ‘조선학생동지회’에서 활동한 고영완과 고완남 오누이의 이야기를 통해 나라를 위해 헌신한 장흥고씨 가문의 또 다른 영웅적 일화를 소개한다. /편집자주

고려말 공민왕 때 홍건적이 침입하자 제주고씨 고중연(高仲?)은 이에 대항하면서 경북 안동으로 왕을 호종한 공적으로 장흥백(長興伯)에 봉해진 후 본관을 장흥고씨로 분적(分籍), 그 후손들은 주로 전남 장흥·담양 등지에서 집성촌을 이루며 살았다.

임진왜란 때 고경명(高敬命, 1533-1592)이 6천여 명의 의병을 이끈다는 장계에 선조는 그에게 초토사(招討使)의 직함을 줬는데, 그는 금산전투에서 둘째 아들 고인후(高因厚, 1561-1592), 안영(安瑛), 유팽로(柳彭老), 의병 수백 명과 함께 순국했다.

맏아들 고종후(高從厚, 1554-1593)는 전라도 관찰사 이광(李洸)을 도와 관군을 이끌었고, 이듬해 제2차 진주성전투에서 왜적에게 성이 점령되자 남강에 몸을 던졌다.

고경명은 명종 13년(1558)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해 호조좌랑을 시작으로 사간원과 홍문관의 요직을 거쳐 동래부사, 공조참의를 지냈고, 고종후는 별시문과에 급제해 사헌부 전적·감찰, 예조좌랑, 임피현령을 지냈다.

고경명이 순국하자 조정에서는 예조판서에 이어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하고 시호를 충렬(忠烈)이라 했고, 고종후에게 도승지, 고인후에게 예조참의에 추증했는데, 숙종 때 고종후는 이조판서, 시호를 효열(孝烈), 고인후에게 의정부 영의정, 시호를 의열(毅烈)이라 하했으며, 선조는 사당에 포충(褒忠)이라 사액해 삼부자를 비롯한 임진왜란 때 순국선열을 기렸다.

포충사 경내 전경.

#김상성이 아뢰기를, "문열공(文烈公) 조헌(趙憲)에게 치제할 때 또한 지장이 되는 단서가 있습니다. 충렬공(忠烈公) 고경명(高敬命) 역시 임진년에 창의해 순절한 인물로 문열공과 더불어 금산 종용사(從容祠)에서 제향하고 있습니다. …조정에서 충렬이란 시호를 하사했는데, 종용사에서도 충렬공을 수향(首享)으로 삼습니다."했다. 홍상빈이 아뢰기를, "종용사의 좌목(座目)에 충렬공이 과연 맨 앞에 있습니다." 했다. 『승정원일기』, 영조 10년(1734) 6월 24일

고경명 의병장 초상화

장흥고씨 가문 외에도 여러 가문이 있다. 담양부사, 수원부사 등을 역임한 나주 출신 김천일(金千鎰, 1537-1593)이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서 주로 경기도 일원에서 활약하자 선조는 창의사(倡義使)라는 직함을 줘 격려했고, 이듬해 제2차 진주성전투에서 아들 상건(象乾)과 함께 남강에 몸을 던져 순국하자 의정부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에 추증하고, 시호 문열(文烈)을 내렸으며, 광해군 때 영의정으로 가증됐는데, 그의 가문은 언양김씨이다.

김천일 의진의 부장으로 김천일과 함께 제2차 진주성전투에서 자결 순국한 나주 출신 양산숙(梁山璹, 1561-1593), 그의 형 양산룡(梁山龍)은 같은 의진의 운량장이었는데, 양산숙은 좌승지에 추증되고, 시호는 충민(忠愍)으로 본관은 제주이다.

광주 출신 광산김씨 김덕령(金德齡, 1567-1596)은 형 김덕홍(金德弘)과 함께 고경명 의진에 참여했다가 모친상을 당해 장례를 치른 후 상복 차림으로 의병장에 오르니, 국왕은 형조좌랑 벼슬과 그의 의병부대를 충용군(忠勇軍)이라 했고, 초승장(超乘將)이라는 칭호까지 줬으나 ‘이몽학의 난’이 진압된 뒤 음해를 입고 혹독한 형문 끝에 누명을 쓴 채 죽음에 이르렀다. 현종 때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시호를 충장(忠壯)이라 했다.

능주(현 화순 속읍) 출신으로 흥양현감, 영해군수 등을 지내다가 모친상에 벼슬을 내놓았던 해주최씨 최경회(崔慶會, 1532-1593)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형 최경운(崔慶雲)·최경장(崔慶長)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금산과 무주에서 왜군을 격퇴하고, 이후 경상우병사에 임명돼 제2차 진주성전투에서 맹활약했으나 중과부적으로 성이 함락되자 남강에 투신 자결했다. 이조판서 겸 대제학 지경연 성균관 춘추관사에 추증되고, 좌찬성에 가증됐으며,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임진왜란 때 왜군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3만여 명에 맞서서 관민 약 4천 명으로 싸우다가 끝내 순국해 이조판서에 이어 좌찬성에 추증되고, 시호 충렬을 받은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 1551-1592)은 전북 정읍 출신으로 본관이 여산(礪山)이다.

이태룡 국립인천대학교 독립운동사연구소장

이태룡(국립인천대학교 독립운동사연구소장/문학박사)
/오승현 기자 romi0328@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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