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경미 (주)더심플&양파컴퍼니 대표이사

지난 2003년 개봉된 영화 ‘살인의 추억’. 그 영화 속에는 단 10초간 등장한 무명의 배우가 있다. 마지막 희생자의 어머니 역할. 대사는 단 두 마디뿐이었고, 그 짧은 장면마저도 관객 대부분은 기억하지 못했다. 심지어 촬영 현장에 있던 스태프조차 촬영장에 온 그녀를 보고 "동네 주민인가?" 하고 지나쳤을 만큼 존재감은 미미했다.
하지만 단 한 사람, 그녀를 알아본 이가 있었다. 봉준호 감독이다. "혜란 씨, 오셨어요?" 그의 짧은 인사 속에는 따뜻한 시선과 묵직한 확신이 담겨 있었으리라.
봉준호 감독은 그보다 앞서 연극 무대에서 염혜란의 연기를 본 적이 있었다. 그녀가 무대 위에서 쏟아내던 감정의 결, 움직임의 생동, 눈빛의 깊이를 기억하고 있었다. 화려한 이력도, 명성도 그때는 없었지만 그는 그녀 안에서 미래의 가능성을 읽어낸다.
염혜란은 그 이후 수많은 작품을 거쳐 ‘국민배우’라는 수식어까지 얻는다. 동백꽃 필 무렵, 경이로운 소문, 영화 ‘증인’ 등에서 묵직한 감정선과 소박한 진정성으로 관객의 마음을 울렸다. 영화 ‘증인’에서 그녀, 살인자의 미소는 지금 생각해도 소름이 돋는다. 누군가에게는 ‘늦게 뜬 배우’겠지만, 사실 그녀는 오랫동안 준비된 진주이다.
여기서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의 핵심은 봉준호 감독의 안목이다. 그는 단 10초의 연기에서 10년의 시간을 읽은 눈. 현재를 넘어서 미래를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그 시선은 지금의 우리 사회에 필요로 하는 능력이기도 하다.
지금은 눈에 띄지 않지만, 미래에 반드시 빛날 사람과 정책, 서비스를 알아보는 안목. 그것이야말로 개인을 살리고, 기업을 키우고, 사회를 진화시키는 중요한 힘이다. 오늘날 우리는 너무 많은 것들을 ‘성과’와 ‘당장 보이는 결과’로 판단한다.
하지만 진짜 기회는 편견과 오해, 알려지지 않음에서 시작되기도 한다. 봉준호 감독의 눈은 그런 것들을 놓치지 않았다.
지금은 미미한 듯 보이지만, 반드시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칠 씨앗들을 알아보는 힘. 그것이 바로 ‘선견지명’이자, 시대를 앞서가는 감각, 현재의 눈으로 ‘미래를 보는 힘’이다.
염혜란은 단순히 ‘발굴된 배우’가 아니다. 그녀는 ‘미래를 준비해온 배우’이다. 그녀를 알아본 사람은 봉준호였고, 그녀를 키운 주인공은 대중이었다.
이제 우리에게도 그 눈이 필요하다. 보이는 사람보다 보이지 않는 사람, 화려한 것보다 진실된 것, 당장의 성과보다 지속가능한 가치를 볼 수 있는 안목 말이다.
우리 주변에도 염혜란 같은 존재는 많다. 묵묵히 자신을 다듬고 있는 동료, 작지만 의미 있는 제품을 개발하는 스타트업, 당장은 예산만 드는 것 같지만 10년 후 지역을 살릴 공공정책. 오해와 편견 속에서 우리를 구원할 여러 가지 것들. 그리고 그(것)들을 향해 "오셨어요?"라고 따뜻하게 맞이할 수 있는 사람이 우리 사회에는 많이 필요하다.
1903년 뉴욕 맨해튼 거리. 마차가 거리를 메우고, 몇 대 되지 않는 자동차는 사람들의 조롱을 받았다. "기름으로 가는 마차가 뭐야?"라며 비웃던 시대. 하지만 단 한 사람, 록펠러는 그 움직임 속에 미래를 본다. 그리고 미국 전역에 주유소를 만들고, 록펠러 가문을 열었다.
비웃음 속에서 미래는 자란다. 감독 봉준호가 염혜란을 알아봤 듯, 록펠러가 자동차한대를 보고 록펠러 가문을 열었듯이 우리도 세상의 작은 가능성들을 외면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 역시 누군가에게 아직 발견되지 않은 진주일지도 모른다. 지금은 눈에 띄지 않지만, 조명이 꺼진 무대에서도 성실하게 준비하는 당신에게, 세상은 이렇게 말할 지 모른다. "오셨어요? 우리 별별그대님"…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