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콘텐츠 보물창고 광주·전남 종가 재발견
왕손 허씨에서 이씨로 변천
고려 명문세족 왕가와 혼맥
세속 거리두고 학덕에 전념
인재 키우고 나눔 정신 계승
독실한 형제 우애…학당 열어 인재 키운 가문

장흥 부산면 만수산 자락에는 금장마을이 있다. 황새가 숨어 있는 명당이라는 풍수를 따라 마을이름이 금장인 이 마을은 고인돌 선사 유적이 보전돼 오랜 마을 역사를 짐작할 수 있지만 1600년대 인천이씨 선조가 장흥에서 입향함으로써 명촌이 됐다고 한다. 이 마을에서 400여년을 세거하며 형제간에 우애하며 학덕을 쌓고 풍속을 교화시켰던 장흥 인천이씨 공도공파 독우재 종가를 찾아 가문의 내력을 알아본다.
◇가락국 왕손 당 황제 성씨 받아
인천이씨는 고려조 상서좌복야에 추증된 이허겸을 시조로 모신다. 득성설화에 따르면, 가락국 김수로왕의 왕후 허황옥 23세손인 허기가 신라 경덕왕 때 아찬을 역임하며 사신으로 당나라에 갔는데 안록산의 난(755년)으로 피난하던 당 현종을 호종했다고 한다. 이로 인해 현종은 시를 써 내리고 황제 성인 이(李)씨 성을 하사했다. 이렇게 두성을 쓰게 된 이허기는 돌아와 소성백에 봉해졌고 그 식읍에서 세거하며 인천을 본관으로 하는 이씨가 번성하게 됐다. 득성조 이허기의 후손은 소성(인천) 토호로서 세력을 유지하다가 10세손 이허겸을 본관조로 삼았고 그는 고려 현종 때 상서좌복야 상주국 소셩현 개국후에 추증됐다.
3세 이자연(1003~1061)은 과거 급제해 벼슬은 양온령, 감문위 녹사참군사라는 하급무관에서 중서령, 문하시중, 판상서이부삼사사, 감수국사를 역임하고 상주국 추성좌운보사공신으로 장화공 시호를 받았다. 그의 세 딸이 모두 문종비가 됨으로써 고려 최고의 왕실 외척집안으로 가문의 위상을 높였다. 순종, 선종, 숙종이 외손자인 동시에 손녀사위이고, 예종, 인종까지 증손녀사위가 됨으로써 일곱 임금과 혼인한 외척세력으로 권력을 갖게 됐다.
◇일곱 왕을 사위로 둔 고려 세도가
이자연의 손자인 3세 이자상은 상서우복야에 올라 상서공파를 열었다. 그의 손자 이공수(?~1137)는 과거 급제해 벼슬은 한림원 습유, 서경유수판관, 병부시랑, 공부상서, 서북면병마사, 수사공 참지정사를 거쳐 중서시랑평장사, 문하시랑평장사 판이부사, 문하시중 상주국에 올랐다. 두차례 요나라에 다녀왔고 추충위공신이며 시호는 문충공이다. 그의 아들 이지저(1092~1145, 호는 자고, 시호는 문정)는 문장에 뛰어나 과거 급제해 우정언을 역임하다 서해도안찰사로 나갔을 때 이자겸의 뇌물 악폐를 금지시키려다 평주부사로 좌천됐다. 다시 등용돼 서경천도론을 반대하고 어사대부, 동지추밀원사, 예부상서, 정당문학 수사공좌복야를 거쳐 참지정사에 올랐다.
14세 이문화(1358~1414, 호는 오천)는 문과 장원급제하고 우정언, 우헌납, 예문응교, 좌승지를 거쳐 도승지 겸 상서윤을 역임했다. 하정사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예문관대제학, 대사헌, 호조판서, 형조판서에 올랐다. 민무질 사건에 연루돼 좌천됐다가 복권돼 개성유수, 참찬의정부사를 맡았으며 장흥 금계사, 대구 서계서원, 함안 도천사에 배향됐다. 시호는 공도공이다. 그가 공도공파를 열었다. 15세 이효지(1411~1464)는 오사상호군으로 의금부낭관이 되어 계유정변의 옥사를 처리하고 절충장군 상호군, 중추원부사에 올랐으며 원종일등공신에 책록됐다.
◇우애하며 효행·학행·덕행 실천
19세 이귀수는 장흥군수를 역임하던 동생 이귀경의 집에 왔다가 와병 중 운명했고 광산 갈전 본가로 운구 중 빈치에서 상여가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에 섶고개에 장사를 지내 자손번성하게 됐다는 설화가 전한다. 그가 장흥 부산면에 입향조다. 28세 이인수는 군사요충지 군위 남해 현령을 지냈다. 그의 동생 이인징(1661~1719)은 통덕랑을 지냈고 종가를 열었다. 32세 이권전(1805~1887, 호는 미천)은 초야에서 학문하다 일찌 타계한 아버지의 소망을 실현해 학유가 머무는 초당으로 독우재를 건립했다. 동생 이요전, 이순전과 함께 효도 대신 독실한 우애를 주고받으며 과객을 예우하고 학당을 열어 인재양성에 힘썼고 나눔과 배려의 가풍을 남겼다.(독우유풍) 그는 깊은 학덕으로 동백정에서 당대 학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강론했으며 장흥향교 전교로서 봉사하며 학행과 덕행을 쌓았다. 종가는 독우재와 고문서 등 선조가 남긴 문화유산 보존과 우애의 가문전통 계승에 힘쓰고 있다.
/서정현 기자 sjh@namdo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