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명규(광주청년정책네트워크 대표)

지금의 한국 정치를 설명할 때 ‘친(親)’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시사프로를 진행하면 어떻게 될까? 친윤과 반윤, 친명과 반명라는 말을 쓰지 않으면서 이 정국을 이해할 수 있을까? 아마도 불가능하거나 가능하더라도 무척 힘든 일이 될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정치인들의 선택과 언행을 이해하는데 친(親), 곧 친하다는 기준 아니고는 어떤 것도 구분하기 어려운 상황에 익숙해진 듯하다.
이제 가치와 세계관, 정책적 지향과 입장이 정당의 운명이나 사회적 현안, 국가적 미래를 가름하는 기준점이 아니다. 단지 권력의 정점에 있는 한 개인을 중심으로 친하다, 가깝다는 것 아니고는 달리 해명할 길이 없는 정치란 얼마나 사사로운가.
이 때문인지 갈수록 정치에서 설득과 소통, 대화와 합의의 지반은 불투명해지고, 맹렬한 지지자 결집과 적대적 대결이 정치의 모든 것이 된 듯한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정치의 무대가 합리적 토론이 벌어지는 아고라(agora)가 아니라 승패를 두고 힘 대결을 펼치는 경기장, 아레나(arena)에 가깝게 된 것이다. 자연스레 시민의 역할도 축소된다. 정치의 중심이 아니라 저 멀리 누군가를 편들며 응원하는 관중석으로 밀려난다.
특정 인물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적대의 지속, 정치적 양극화는 지지자를 높은 흥분과 도취 상태로 얼마나 길게 유지할 수 있는가, 상대 정당에 대한 적대감을 얼마나 고조시킬 수 있는가에 열중한다. 결국 치솟는 물가, 쌓이는 가계부채, 불안정한 일자리, 시급한 국민연금 개혁과 같은 삶의 주요한 현안은 여전히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다.
정치가 아레나에서 소란스럽게 벌어지는 동안, 경기장 바깥의 시급한 삶의 문제는 외명당하고 더욱 악화한다. 문제는 이런 상태의 지속이 다시 정치적 양극화와 극단주의가 자라는 자양분이 된다는 점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나아지지 않은 삶에 대한 시민의 불안과 긴장은 방향성이 없는 잡음이거나 소음으로 남겨질 가능성이 크고, 그 소리를 특정한 신호로 증폭하는 일은 결국 아고라가 아닌, 아레나에서 이뤄지기 때문이다. 권리의 수신자이자 발신자인 시민은 없다. 동지와 적, 그리고 동원해야 할 ‘대상’만 있을 뿐이다.
로버트 단턴의 ‘고양이 대학살’은 1740년대, 한 인쇄소에서 벌어진 고양이 학살 사건을 통해 당시 프랑스 사회에 잠재되어있던 사회적 문제와 갈등이 해결되지 못할 때, 발생할 수 있는 병리적 사례를 보여준다. 1664년 정부 칙령이 발표되면서 인쇄소 장인(주인)의 숫자는 줄었고, 이미 세습하고 있던 장인의 지위는 더욱 특권화된다. 반면 그 밑에서 일하는 직인의 지위는 1723년 칙령으로 인해 더 나빠지고 값싼 노동력과 경쟁해야 하는 이중 압력을 받는다. 더군다나 정부의 노동조합 탄압 조치로 인해 자신의 이익을 관철하는 길마저도 차단되었다.
인쇄소 장인(주인)과 직인이 동등한 협력자로 즐겁게 일하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한 식탁에서 장인과 하던 식사는 이제 주인집 고양이 밥보다 못한 상태로 추락하였다. 이때 사건이 벌어진다. 두 명의 직인은 자신의 분노를 엉뚱하게도 주인이 키우는 고양이 탓으로 돌린다. 그들은 주인집 고양이를 죽이기 위해 계략을 꾸미고, 마을 고양이들과 함께 닥치는 대로 잡아 한꺼번에 죽인다. 그날 저녁 직인들과 술집에 모여 주인에 대한 훌륭한 복수를 연극처럼 재연한다. 로버트 단턴은 프랑스 혁명 직전 한 마을에서 발생한 이 고양이 학살 사건을 18세기 추락하는 인쇄공들의 삶이 초래한 좌절과 불안의 표현으로 보고, 그 당시 무해한 장난으로 여겼던 고양이 학살이 사실은 엄격한 위계질서와 억압적인 사회 조건에 대한 상징적, 반항적 폭력이라 해석한다. 그렇다. 억압된 것은 사라지지 않고 돌아온다. 단지 사회의 가장 약한 균열을 따라 다른 방식으로 표현될 뿐이다.
최근 들어 유럽연합의 청년정책과 관련한 자료를 읽다 보면, 청년의 정치적 극단주의와 폭력적 급진화에 대한 우려를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높은 청년실업과 나아질 것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은 정치와 민주주의에 대한 환멸과 분노로 이어지기 마련이고, 이는 복잡한 사회문제에 대한 간단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극단적 정치세력에 대한 열광으로 번지기 쉽다. 한국이라고 다를까? 엉뚱한 고양이 찾기는 이미 벌어지고 있는지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