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승현(남도일보 사회부장)

 

오승현 남도일보 사회부장

매년 5월이 오면, 광주는 어김없이 분주해진다. 하늘은 맑고 공기는 따사롭지만, 5·18 민주묘지로 향하는 발걸음은 늘 무겁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이 열리는 날이면, 수많은 정치인들의 발걸음을 지근거리에서 지켜보며 몇 번이고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저 사람, 작년에도 왔던가?’ ‘저 눈물은 진짜일까?’

수습기자 시절 5·18 기념식 현장 곳곳에서 수도 없이 ‘묘지기’를 자처(?)했었다. 민주의문 앞에서 카메라와 기자수첩을 들고 취재 내용을 적고, 헌화 순서를 조율하며, 때론 기자들의 눈치를 살피고, 때론 정치인의 행보에 불편한 시선을 보냈다.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광주를 찾는 정치인들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숙연한 듯하면서도 계산된 동선, 감정을 억누른 듯한 울먹임, 그러나 그 속내가 무엇인지는 너무도 명확하게 드러났다.

올해도 그럴 것이다. 다가오는 5·18 기념식은 대선을 불과 16일 앞두고 열린다. 이보다 더 ‘적절한’ 타이밍이 또 있을까. 수많은 정치인들이 경쟁하듯 광주를 찾을 것이다. 누가 먼저 유족의 손을 잡을지, 누가 더 자연스럽게 울먹일지, 누가 더 오래 머무르며 ‘광주의 진정성’을 흉내 낼지에 관심이 쏠릴 것이다. 그들은 말한다. "5·18 정신을 헌법 전문에 넣겠다", "진상 규명에 앞장서겠다." 그러나 묘지 앞에서 울먹이며 약속한 그 말들이, 선거가 끝난 뒤 얼마나 자주 허공으로 흩어졌는지를 우리는 알고 있다.

5·18은 ‘누구의 적통인가’를 다투는 정치적 레퍼토리가 아니다.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국가 폭력에 맞섰던 평범한 시민들의 이야기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광주는 ‘정치적 부채’를 탕감받기 위한 통과의례처럼 소비되고 있다. 실제로 어떤 이는 "광주에 안 가면 큰일 난다"고 말했고, 또 어떤 이는 "그냥 조용히 다녀오면 된다"고 말했다. 이 얼마나 기만적인 표현인가. 5·18은 그저 ‘조용히 다녀올’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곳은 여전히 응답을 기다리는 유족들이 있고, 진상 규명을 외치는 시민들이 있고, 왜곡과 망언에 치를 떠는 역사의 목격자들이 있는 살아있는 장소다.

나는 기억한다. 한 장관이 취임 직후 처음으로 광주를 찾았던 날, 참배를 마친 뒤 돌아서는 그의 표정은 완전히 비어 있었다. 수백 장의 사진 속에 담긴 그는 ‘성공적인’ 광주 방문을 마쳤지만, 나는 단 한 번도 그의 입에서 5·18에 대한 실질적인 입법이나 예산 확대를 위한 언급을 들어본 적이 없다. 그저 보여주기 위한 ‘정치적 순례’였을 뿐이다.

특히 진보·보수를 가릴 것 없이, ‘광주의 유령’을 정치적으로 호출하는 행위는 이제 지겹고 피로하다. 누군가는 5·18 정신을 앞세워 진보의 적통을 주장하고, 또 누군가는 그 정신을 받아들인다며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지만, 선거가 끝나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광주를 잊는다. 어떤 이는 광주의 분노를 의도적으로 자극해 지지층을 결집시키고, 또 어떤 이는 역사의 고통을 조롱하는 발언으로 관심을 끈다. 이렇게 5·18은 매년 ‘정치적 콘텐츠’로 변형되고, ‘전시된 추모’로 박제된다.

광주는 추모의 장소이자, 아직 끝나지 않은 질문의 공간이다. 아직도 발포 명령자는 밝혀지지 않았다. 여전히 진상조사위원회의 활동은 지지부진하고, 가해자에 대한 법적 책임은 시간 속에 묻혀가고 있다. 망언을 일삼는 정치인은 여전히 국회에 앉아 있고, 그를 감싸는 정당은 "개인의 의견일 뿐"이라며 선을 긋는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인들의 ‘광주행’은 어떤 의미가 있고 그 발걸음이 ‘진정성’이라는 두 글자를 감당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5·18 정신을 계승하겠다는 말은 쉬운 약속이다. 그러나 그것을 실제로 실천하기 위해 필요한 일들은 결코 쉽지 않다. 망언에 대한 명확한 징계, 진상규명을 위한 법률 통과, 예산 증액, 역사 왜곡 방지법의 제정 등은 말보다 행동으로 증명해야 한다. 그런데도 매년 5월만 되면, 같은 말과 같은 장면들이 되풀이되고 있다. 그 속에서 진정한 추모는 사라지고, 남는 것은 정치인의 ‘연출된 장면’뿐이다.

다가오는 45주년 5·18 기념식은 마지막 기회일지 모른다. 단지 과거를 기리는 행사에 머물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출발점을 성찰하고, 다시는 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제도와 인식을 바로잡는 실질적 계기가 돼야 한다. 정치인들은 광주의 묘역 앞에서 입술이 아니라, 기록과 실천으로 답해야 한다. 자신이 무엇을 외쳤는지가 아니라, 무엇을 하지 않았는지를 돌아보아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5·18을 기리는 유일한 방식이다.

정치인은 이 기념식에서 조연이어야 한다. 진짜 주인공은 45년 전 총칼 앞에서 두려움 없이 맞섰던 평범한 시민들이고, 그들의 유가족이며, 지금도 광주를 지키고 있는 이들이다. 정치인은 그 곁에서 침묵으로 책임을 다해야 한다. 그 침묵 속에 진정한 사죄와 연대가 담겨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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