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덕 스님은 비기 탈취 사건을 통하여 동학교도들이 결속을 강화하고, 세력을 크게 확장하는 기틀을 만드리라 믿었다. 그는 비기가 가리키는 예언을 믿지 않았으나 비기 절취(竊取)는 민중의 염원과 기대를 고양시키는 상징적 사건이 되리라 확신하였다. 절망하는 민중들에게 희망의 구원자가 되리라 믿었던 것이다. 만덕 스님은 이 소식을 일대 사건으로 보고 널리 유포하여 젊은이들을 설득하여 손화중포에 보냈었다.
만덕이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세상의 진리는 어둠을 밝히는 빛이니, 그 빛을 따라 여러분은 선운산으로 들어가게."
"선운사에 돈이 쪼까 있습니까."
아직도 깨우치지 못한 도박꾼들이었다.
"그곳에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동학군이 들어가 있네. 합류하여 힘을 보태시게."
"도둑질하고 애먼 사람 두들겨 패는 상놈의 새끼들과 어울리라고요?"
이 말에 만덕 스님이 비로소 노여운 빛을 띠었다.
"그럼 여기 투전판은 그런 상놈에 새끼들보다 나은 종자들인가?"
노스님답지 않은 일갈이었다. 이응서가 분위기를 알고 수습하였다.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이 자들을 이끌고 들어가겠습니다."
그리고 선운산으로 들어가 손화중포로부터 광주·광산 지역의 집강으로 임명돼 배치되었던 것이다. 이응서는 백양산록에 진을 친 뒤 사격술, 육박전, 유격 훈련 틈틈이 만덕 스님을 초청해 설법을 들었다. 이런 사정을 알 바 없는 김도향이 토라져서 말했다.
"나는 당신이란 사람을 당최 몰르겄어라우."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 난망인 것이다. 도박판을 기웃거리고, 기생들과 놀아나더니, 이번에는 거지 같은 요상한 청년들과 산속에서 거렁뱅이 짓을 한다. 그녀가 애원하였다.
"이참에 집으로 돌아갑시다. 가서 사람답게 살아야지라우."
"사람답게 살자고?"
"야. 비단옷 입고 말을 타고, 팔자걸음으로 하인들 거느리고 앞배미 논, 징구지 논밭을 돌아보면서 사람답게 살아야 할 것 아니오? 떵떵거리고 살 양반이 이 산골짝에서 무슨 청승이요?"
"돌아갈 수 없소."
이응서가 주저 없이 단정적으로 잘랐다.
"환장하겄네. 비르적대는 인간 군상들하고 배곯으며 고생할 이유가 있소?"
"고생할 이유? 신분의 높고 낮음이 없이 공평하고 평화롭게 사는디 고생한다고? 이것이 사람답게 사는 것이오."
"당신 머리가 돌아부렀소? 어째 노장 스님을 만나더니 선문답하는 것도 아니고,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맹이로 하릴없는 뜬구름 잡기를 하는디 나는 당초 몰겄소. 지발 현실에 뿌리를 내리고 사시란 말이오. 당신, 무슨 꿈을 꾸고, 무슨 세상을 바라는지 몰르겄지만, 이것은 아닌 것 같소. 정 이렇다면 친정으로 돌아갈 것이오."
김도향이 내친김에 덧붙였다.
"이렇게 살면서 왜 집안의 황소를 끌고 가고, 곡식을 몇백 석씩 훔쳐가셨소?"
그러나 이응서는 진실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투전판을 기웃거리면서 쌀가마니를 빼돌렸지만, 동학에 입도한 이후에는 농민군사들을 먹이기 위하여 가져왔던 것이다. 내놓고 말할 수 없었던 것은 농민군의 봉기를 모두가 반란으로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김도향을 재운 뒤 봉덕을 불러냈다.
"숲속으로 가서 얘기할까?"
그들은 어두운 숲속 반석에 걸터앉았다. 이응서가 물었다.
"만덕 스님의 설법을 들었던가?"
"들었습니다."
"그랬더니?"
"좋은 시상 만들라고 하더만이요."
"좋은 세상을 만든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행동해야 한다고 했지요. 인간의 만남이 억만겁의 인연인디, 그런 만큼 시간을 소중하게 쓰라고 하시더만이요."
"잘 보았다. 집으로 돌아가서 하인들을 데리고 산으로 와라. 봉덕이도 오늘로 자유인이다."
그러자 봉덕이 절푸덕 무릎을 꿇더니 하소연했다.
"작은 주인마님, 소인 버리지 말아주십시오. 더 쎄빠지게 일하겄습니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