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연수 독자위원(전 호남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1930년대 초 만주 길림성의 한국 소작인들이 모여 사는 마을에 ‘삵’이라는 별명을 가진 정익호가 살고 있었다. 그는 투전과 싸움으로 이름난 마을의 골칫덩이요 망나니였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그를 꺼려했으며, 사람이 죽으면 "삵이나 죽지" 할 정도로 그를 미워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송 첨지라는 노인이 소작료를 적게 냈다 하여 만주인 지주에게 얻어맞아 죽는다. 이에 마을 사람들은 흥분만 할 뿐 감히 그에게 항의 한마디 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 동구 밖에 ‘삵’이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있었다. 그는 혼자서 그 만주인 지주를 찾아가 항의와 싸움 끝에 그를 해치웠고, 이로 인하여 자신 또한 죽을 지경에 이른 것이다. ‘삵’은 임종 직전에 ‘나’에게 "붉은 산과 흰옷이 보고 싶다"고 말하였고, 이 말과 함께 ‘삵’은 마을 사람들이 들려주는 애국가를 들으며 운명한다. 이 작품에는 일제의 수탈을 피해 만주로 이주한 우리 조상들의 뼈저린 비애와 민족적 분노가 담겨져 있다. 1932년에 발표된 김동인의 <붉은 산>이라는 단편소설의 대략적인 줄거리다. 이 소설의 모티브는 1931년에 일어난 이른바 ‘만보산 사건’이다.
1931년 7월 1일과 2일 중국 지린성(吉林省) 창춘현(長春縣) 북동쪽 만보산(萬寶山) 지역 삼성보(三姓堡)에서 중국인 400여 명과 한인(조선인) 200여 명이 충돌했다.
발단은 한인들이 그 해 4월 만보산 북서쪽 황무지를 임차해 개간하려고 물을 끌어오는 수로 공사를 벌이다 발생했다. 수로가 지나는 지역의 중국 농민들은 침수 피해와 수운(水運) 장애를 이유로 반대하며 공사를 방해해 여러 차례 시비가 벌어졌다. 창춘현 정부는 공사 중단을 명령했으나 한인 농민들은 공사를 강행했다. 그러자 중국 농민들이 완공을 눈앞에 둔 수로를 파괴해 충돌 사태가 벌어졌다. 한인 농민들에겐 생존권이 달린 문제였고, 중국 농민들은 한인들을 땅 빼앗으러 온 경쟁자이자 일본 대륙 진출의 앞잡이로 여겼다. 양측이 삽과 곡괭이를 든 채 난투극이 벌어졌다. 그러나 다행히 숨진 사람은 없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김이삼 조선일보 창춘지국장은 현장 취재나 추가 확인을 하지 않은 채 일본 영사관이 제공한 정보만 듣고 기사를 작성해 본사에 타전했다. 서울의 조선일보 본사도 그가 보낸 전보를 그대로 활자화했다. 조선일보는 7월 2일자 2면에 ‘중국 농민 대거 폭동 / 삼성보 동포 수난 갈수록 심해져 / 200여 명 또다시 피습 / 완성된 수로 공사 전부 파괴’란 제목 아래 "많은 조선인이 살해됐다"고 보도했다. 호외까지 발행하며 민족 감정을 자극했다.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었을 뿐 아니라 사태의 위험성을 크게 부풀렸다. 그러나 이들 기사를 보고 흥분한 한국인들은 만주 동포들을 대신해 복수하는 마음으로 국내 거주 중국인(화교)들을 공격하고 나섰다. 가장 큰 참극이 벌어진 곳은 평양이었다. 평양 시민들은 닥치는대로 화교들을 공격하고 집과 가게에 불을 질렀다. 7월 8일까지 사망자가 109명, 부상자가 163명, 행방불명자가 63명에 이르렀다. 한바탕 광풍이 지나가고 윤치호 등 민족지도자들과 중국 국민당의 조사에 의해 ‘만보산 사건’은 일본의 계획적인 음모임이 밝혀졌다. 만보산 사건은 민족 감정을 자극해 조선인과 중국인을 분열시키고 만주사변을 일으키는 데 이용하고자 한 계략이었다. 사실 확인 없이 영사관에서 써준 기사를 호외까지 발행한 조선일보의 책임이 제일 크다. 당시 김이삼 지국장은 일본의 첩보원으로 밝혀졌다. 최근 확산한 반중·혐중 정서가 대통령 탄핵 정국을 맞아 위험한 지경으로 치닫고 있다. 중국이 부정선거에 조직적으로 개입했다느니, 탄핵 반대 시위를 진압하는 경찰 가운데 중국 공안(公安)들이 섞여 있다느니, 헌법재판소 공보관과 연구관이 중국인이라느니 하는 근거 없는 괴담들이 떠돈다. 자극적인 괴담의 진원지는 이른바 뉴라이트를 표방하는 친일 매국 세력들이다.
1세기 전 만보산 사건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미디어와 통신이 발달하고 민주주의와 인권이 신장됐음에도 걱정을 떨칠 수 없다. 일부 신문과 유튜브 등이 허위 조작 정보를 빛의 속도로 전파하고 대통령을 비롯한 여권 정치인들이 반중 감정을 부추기고 있기 때문이다. 민족이나 종교 등을 이유로 한 혐오나 공격은 그 자체로 반인륜적 범죄일 뿐만 아니라 경제와 외교와 안보 등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치는 일이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지만 과오를 되풀이할 수는 없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