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래는 계속 이어지고, 밤이 무르익어가는 사이 고을 청년들이 자원입대하여 한데 어우러졌다. 숫자는 가일층 불어났다.
(중략)강진의 상가선(商賈船)은 진도로 건너갈제
금구(金溝)의 금(金)을 일어 쌓인 게 김제(金堤)로다
농사하는 옥구 백성 임피사의(臨陂蓑依) 둘러입고
정읍의 정전법(井田法)은 납세인심(納稅人心) 순창이라
고부(古阜) 청청(靑靑) 양유읍(楊柳邑)은 광양 춘색이 팔도에 왔네
곡성의 묻힌 선비 구례(求禮)도 하려니와
흥덕(興德)을 일삼으니 부안(扶安) 제가(齊家) 이 아닌가
호남의 굳은 법성(法聖) 전주(全州) 백성 거느리고
장성(長城)을 멀리 쌓고 장수(長水)를 돌고 돌아
여산석(礪山石)에 칼을 갈아 남평루(南平樓)에 꽂았으니
삼천리 좋은 경(景)은 호남이 으뜸이라…
노랫소리와 함께 공삼덕 놀이패가 자지러지게 풍악을 울렸다. 장정들이 기름 번드르한 얼굴로 한데 어우러져 마당을 돌며 신명나게 덩실덩실 춤을 춘다. 그것은 흡사 큰 강물의 흐름과도 같았다. 강물은 어떤 무엇도 삼킬 것 같고, 동시에 어떤 무엇도 어루만져줄 것 같았다.
광장 한쪽에 설진수와 김옥규가 막대기로 땅바닥에 낙서를 하며 놀이패와는 상관없이 우두망찰 앉아있었다. 둘은 아비가 관아에 끌려가 고문사 당한 뒤 동학군에 들어갔다가 때로는 지루하여 팔도를 주유하였다. 그러면서 충청도 예산, 홍주(홍성), 경기도 용인, 안성 고을에서 의료진료로 포덕활동을 벌이는 정이두를 찾았다. 그랬어도 어딘가 모르게 갈증이 생겼다. 정이두로부터 도(道)를 받은 후 매일 청수를 떠놓고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 주문을 외며 수행했으나 세상의 변화는 없었다. 오히려 혼란만 가슴 속에 새겨졌다.
정이두가 그들 곁으로 다가왔다. 그들은 각기 헤어졌다가 함평땅에서 조우했다.
"같이 어울리지 않고…"
"선생님, 가도가도 끝이 없어 보입니다."
김옥규가 땅바닥에 이것저것 낙서를 하다 말고 정이두를 향해 말했다.
"답답할 때면 주문을 외지."
"주문을 외면 더 마음이 심란해져요. 구체성이 없승깨 허무감만 든당깨요."
"주문이란 하느님의 신령이 사람의 몸에 내려와 기화(氣化)하기를 바라는 소망이지만, 안되면 억지로 기도할 필요는 없지. 주문이란 지극하다는 뜻이요, 신령의 기운이 내 몸에 내려와 청하여 바라는 뜻이나, 반대로 뜻대로 안되면 억지로 붙들어맬 필요는 없네."
"고전과 한학을 공부해봐도 옛날로 돌아가는 길밖에 없고, 신학문과 농촌의 현실문제를 고민해보아도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지 모르것구만요."
"그런 문제의식은 좋네. 하지만 절망을 할 수는 있어도 포기하면 안되지. 공부할 수 없는 환경이라고 하지만, 그런 문제의식 자체가 살아있는 공부야. 구체성이 없더라도 젊은이의 도전 정신은 젊은이의 특권일세."
도전의 당위성은 인정되지만 농민군이 지닌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무엇을 만들어내자고 해도 어떤 물질도 자본도 없다. 모두가 하나같이 결핍만이 가득하다. 그래서 전쟁터에서 불쏘시개로 기능하는 수준 밖에 안된다는 상실감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관과 싸워서 얻은 것이 무엇입니까? 그리고 끝까지 이길만한 시간과 무기가 있습니까."
김옥규는 동학농민군이 관아를 습격했으나 얻은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무기 따위 얻자고 공격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싸움의 끝은? 왕실 조정, 사대부, 지방 관아, 토호, 유림 세계 모두가 적대적인데 돌파해나갈 힘이 있는가.
정이두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얻는 것이 없지만, 꼭 얻어야만 운동을 하는 것은 아니지."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