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 북평 이진마을]
학생독립운동 주역 이기홍, 황동윤, 왕재일 등 퇴학, 투옥 후 고향서 운동
해남, 완도, 장흥, 영암 등 전남 서남권 농민 3200여명 연루 558명 체포
각 마을에 청년, 농민반 등 조직 치밀 소작료 감면 실질적 경제투쟁 전개
1933년 5월 명칭은 ‘전남운동 중앙지도기관’…일제가 협의회로 작명해

1933년 5월 14일 해남 북평면 동해리 성도암(成道庵)에 20대 청년 3명이 자리했다. 완도와 해남에서 농민운동을 하던 김홍배, 오문현, 황동윤이었다. 김홍배(당시 24세)는 해남 북평 이진리 출신으로 부유한 지주 가문에서 태어나 와세다대학 전문부를 다니면서 사회주의 사상에 공명됐다. 1932년 4월 메이데이 선전유인물을 뿌려 퇴학 당하자 그해 여름 귀향해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황동윤(25세)은 완도 군외면 출신으로 일본에서 노동운동을 접하고 1931년 귀향한 뒤 완도읍 조선일보 기자와 농사일을 병행 중이었다. 오문현(22세)은 해남 북평 오산리 출신으로 경성고학당 재학중 사회주의 사상을 접했으며, 고향에서 농민운동을 생각 중이었다.

#20대 해남,완도 청년들 농민조직 구축
이들은 3인회합(1차 중앙회의)을 통해 전남 서남부지역 혁명적 농민운동을 지도할 비밀단체인 ‘전남운동 중앙지도기관’을 결성했다.
김홍배 주도로 4개 부서를 두고 역할을 분담키로 했다. 이들은 중앙조직으로 ▲사무부 및 총책임자 김홍배 ▲조직 및 재정부 오문현 ▲조사 및 출판부 황동윤 ▲구원 및 선전교양부 이기홍으로 결정했다. 이날 결성식에는 이기홍이 불참, 사후에 승인받았다. 기관지로 ‘농민투쟁’을 발간키로 했다.
이기홍은 완도 고금에서 태어나 고금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1928년 광주공립고등보통학교에 진학, 1929년 2학년 때 광주고보 독서회에 가입했으며, 광주학생시위에 참여했다. 이어 1930년 3학년 진학을 위한 시험을 앞두고 백지동맹을 주도해 퇴학 당했다.
1930년대 최대 항일조직으로 평가받는 ‘전남운동협의회’ 가 드디어 공식 출범한 것이다. (이하 글은 운동협의회로 표기)
이기홍 선생은 생전 회고록 ‘내가 사랑한 민족 나를 외면한 나라’에서 "당시 일제 판결문에는 이 조직명칭을 ‘전남운동협의회’와 ‘적색농민조합’이라고 명시돼 있는데, 결성 당시의 정식 명칭은 ‘전남운동 중앙지도기관’이었다"면서 "협의회와 적색은 일제경찰이 붙인 것이며, 농민이 들어가는 말에 항상 적색을 붙여 공산주의 색채를 뚜렷이 부각시키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협의회 기본테제와 조직
협의회는 2개 단위로 상부 조직과 회의체계를 구성했다. 우선 중앙회의는 김홍배, 황동윤, 이기홍, 오문현 등 4명의 간부들만 참여하는 것으로 처음에는 한달에 2회 열었다. 나중에 조직 보위 차원에서 월 1회로 줄였으며, 주로 해남 송지면 만덕사, 해남 와룡리, 대흥사 심적암 등지에서 회합했다. 전체회의는 중앙회의 간부 4명과 전남 각 군의 대표자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것으로 필요 때마다 소집했다.
2차 중앙회의는 1933년 8월11일 해남 해남 대흥사 심적암에서 열렸다. 이날 회의에서 행동강령을 심의 결정하고, 각 군의 농민조합 결성 준비 책임자를 선정했다. 조직운영의 핵심 내용은 ▲농민운동을 원칙으로 한다. ▲밑으로 부터 전선 통일을 바탕으로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구축 ▲농민운동의 중심은 빈농으로 함 ▲토지자본가의 친일 사상을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이 반제 운동임을 인식 ▲모든 본건 사상을 배격 ▲소작료 감면과 이작 반대로 소작농민의 이익 보호 등이었다.
협의회는 또 농민조합의 세포인 반(班)은 한 마을을 단위로 하되, 6인이 되는 경우에는 두 반으로 나누기로 했다. 지도적 역할을 할 만한 강력한 농민반에는 중앙조직체와 동일하게 4개 부서를 두기로 했다. 청년반과 소년반은 별개로 두며, 농민반이 3개 이상 있는 면에서는 면 지부를 결성하기로 했다. 면 지부가 3개 이상일 때는 군 조합을 결성한다고 결의했다.
박찬승 한양대 교수는 "이들은 각 마을에 농민반, 청년반 등을 조직한 뒤 이를 토대로 면 단위의 적색농민조합 지부를 결성하고, 이를 토대로 다시 군 단위에 적색농민조합을 조직한다는 운동방침을 세운 것"이라면서 "이른바 아래로 부터의 통일전선운동의 방침에 충실했다"고 밝혔다. (‘완도군 항일운동사’책 전남운동협의회 사건 참조)

#전남서남해안 지역에 급속 확산
운동협의회는 전남 각 군에 하부조직을 꾸려나갔다. 완도 9개 섬은 이기홍과 황동윤이 맡고, 해남은 김홍배와 오문현이 책임졌다. 2차 확산조직으로 이기홍에게 강진-장흥-영암라인이 배정됐다. 각 책임자 포섭은 철저하게 점조직 방식이었다. 우선 강진 책임자로 오문현과 사촌지간인 윤가현을 내정했다.
윤가현은 학생독립운동 후 징역을 살다 내려와 1930년 1월 장날에 강진 대구보통학교 학생들을 선동, 시위를 벌인 인물이었다. 윤가현은 장흥의 유재성을 추천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완도, 해남 2개 군에서 시작해 강진, 장흥, 영암, 광양, 보성, 무안, 목포까지 조직원을 획득해 나갔다. (협의회 3차 중앙회의 보고 내용) 협의회 조직은 진도, 고흥, 화순을 제외한 전남 전역에 구축됐다.
1934년 초 전남 5개군 53개 마을에 농민반이 조직됐다. 1934년 2월에 18개 반이 추가 결성 중이었다. 또한 문맹퇴치를 위한 농민야학·노동야학 28개소를 설치해 사회주의 이념과 항일사상을 교육했다. 영암 군서면의 경우 26개의 야경단을 조직하여 표면적으로는 경찰관서와 제휴하면서 속으로는 농민운동을 전개했다. (추후 야경단 43명 체포)
해남 북평면 이진리·서홍리, 완도 고금면·군외면, 장흥 남면 등 전남 곳곳에서 농민반을 중심으로 소작쟁의의 불길이 타올랐다.
농민·어민들의 실상을 풍자하는 소인극 공연도 열려 의식화를 담당했다. 소인극은 마을주민들이 배우로 참여하는 아마추어 연극이었다. 공연‘어느 농민’은 지주의 착취를 풍자한 연극으로, 청년 농민들의 계급의식 고취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해태조합과 어업조합에 들어가 조직원을 늘려 나갔다.
농촌진흥회 같은 관변단체에 들어가 이를 이용하고, 야경단을 조직해 대중의 신임을 얻었다. 이념형 엘리트 중심의 운동이 아닌, 철저한 밑바닥 농민과 대중의 이익과 눈높이에 맞춘 농민 이익형 운동을 지향했다. 이 모든 것을 지도한 상부조직은 ‘전남운동 중앙지도기관’이었다.

#망년회 충돌 후 대대적 검거 선풍
정식 출범한지 7~8개월쯤 지났을까. 1933년 말 강진군 군동면 청년 12명이 술자리에서 경찰 윤금죽과 충돌했다. 이를 계기로 경찰측은 청년들의 집을 대대적으로 수색했는데, 느닷없이 사회주의 서적이 발견됐다.
이 책은 완도 출신 이현렬이 일본에서 구입해 이기홍에게 전해준 것이었고, 다시 강진의 윤가현에게 빌려주었다. 책을 통해 조직 연결망이 드러나고 말았다. 1934년 1월 강진 조직책 윤가현이 체포되고, 2월 전남경찰부 고등과 노주봉 주임이 지휘하는 대규모 검거 작전이 시행됐다.
해남·완도·장흥·강진·영암 등 9개 군에서 558명이 체포됐다. 연루자는 약 3,200명에 달했다. 이 중 57명은 치안유지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기소,1934년 9월9일 광주지법목포지청으로 송치됐다. (이들 57명 중 47명만 국가서훈)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은 황동윤·김홍배에게 징역 3년, 오문현·이기홍에게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했다. 이 사건은 당시 조선일보가 호외를 제작해 배포할 만큼 일제와 조선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황광우 작가는 "전남운동협의회는 당시 조선의 인구 2천만 시대에 3천 명이 연루된 거대한 항일조직이었지만, 국가가 아직도 이들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다"면서 "김홍배, 이기홍 선생의 서훈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토로했다.
1930년대 흐릿해져가는 독립운동 전선에 다시 횃불을 밝힌 전남운동협의회-. 이 비밀 농민운동의 주역 이기홍, 최규문, 왕재일, 문승수, 황상남 등은 광주고보, 농업학교, 사범학교에서 학생시위를 벌였다가 퇴학, 제적되고 구속된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학생운동의 경험과 조직력,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고향으로 내려와 결코 좌절하지 않고 농민운동을 항일운동으로 전환시켰다. 학생운동 세대가 농민운동 지도자로 다시 일어섰다.
그들의 평균 나이가 26세였다. 결코 꺾이지 않은 빛나는 청춘의 항일 혼이여~~!!
/이건상 기자 lgs@namdonews.com
위치 : 전남 해남군 북평면 이진리 이진마을 (김홍배 생가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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