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학생독립운동 6-광주 옛 경영방죽 터}
1944년 기환도, 강한구, 윤봉현, 주만우 등 숨져
광주서중 비밀 독서회 재건 교내서 독립투쟁
광주고보서 1938년 서중으로 개편, 독서회 조직
1926년 성진회 결성부터 44년까지 광주학생들 항일

 

1930년대 광주서중 전경. 1938년 일제는 조선교육령 개정안에 따라 광주고보 대신 광주서중학교로 교명을 변경했다. /독립기념관 제공

1938년 한반도는 철저하게 일본 식민지 지배체제에 편입됐다. 일제는 1931년 만주 대륙을 침탈한데 이어 1937년 7월 중일 전쟁을 일으켰다. 일본은 전쟁국가, 제국주의로 치달았다. 한반도는 일본의 전쟁 병참기지로 전환됐고, 조선인의 강제 동원과 정체성 말살 정책이 시행됐다.

일제는 특히 ‘국가총동원령법’을 제정, 물자ㆍ인력의 강제 동원에 대한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강제 동원은 지원병제, 할당모집, 징용의 형태로 실현돼 300만 명의 한인들이 일본 전역으로 끌려갔다. 만약 총동원 명령에 불복하면 3년 이하의 징역과 5천엔 이하의 벌금 등 강력한 처벌이 뒤따랐다.

그해 교육현장에도 대변화가 일어났다. ‘조선교육령 개정’이 발효돼 ▲황국신민화 ▲동화교육 강화 ▲학교명칭·교육내용의 일본화 ▲전문학교 통제 강화 등 4대 정책이 교단에 몰아쳤다. 황국신민화와 동화교육은 조선인의 정체성을 말살하는 것으로 일본화 교육이 본격화했다. 수업 시간에 조선어 교육이 사라졌다.

일본과 조선은 하나라는 ‘내선일체’와 전쟁에 대비해 강한 체력을 요구하는 ‘인고단련’이 학교 현장마다 구호로 등장했다. 보통학교는 소학교로, 고등보통학교는 중학교, 여자고등보통학교는 고등여학교로 각각 명칭이 변경됐다.1938년은 한마디로 전쟁국가 일본의 모든 전시형 정책이 그대로 한반도에 투영된 야만의 시간이었다.

#광주서중 첫 비밀독서회 결성

조선교육령 개정에 따라 광주공립고등보통학교(광주고보)도 교명이 5년제 광주서중학교로 바뀌었다. 그해 5월 광주서중생 기환도, 나금주, 주하중 등이 비밀 독서회를 조직했다.

독서회는 주로 ‘간디’ 별명을 지닌 기환도가 퀴리부인전, 간디전과 같은 조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나라의 위인 전기를 선정하고, 회원들이 읽고 토론하는 방식으로 운영됐다.

이듬해인 1939년 5월 기환도, 나금주, 주하준, 유몽룡, 남정준, 주만우, 강한수 등은 독서회를 확대 발전시킨 비밀결사체 ‘무등회’를 결성했다. 명칭은 광주의 상징이자, 과거 광주고보 독서회가 결성식을 가졌던 무등산에서 따왔다.

이들은 4대 행동강령으로 ▲서중 혼으로 무장하고, 영웅적인 선배들의 얼을 전교 학생드에게 심어줄 것 ▲일제 식민지정책 반대 투쟁에 젊음을 바칠 것 ▲주체성을 기르기 위해 독서운동을 전개할 것 ▲동지를 위해, 보안을 위해 목숨을 초개와 같이 여길것 등을 결정했다. 
 

나금주
기태룡(영도)
기태룡(영도)

 

 

배종국

 

#퇴학, 구속 등 1차 무등회 사건

무등회는 과거 성진회(1926년)나 독서회중앙부(1929년) 등 광주학생독립운동 전후의 비밀결사체와 달리 외부 보다는 학교 일상공간에서 활동했다. 학교 강당 뒤나, 운동장 구석진 곳, 무기고 뒤, 온실 안 등 교정이 만남과 토론의 장이었다.

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광주학생독립운동 선배들의 무용담과 임시정부의 활동 상황, 일제의 식민지 차별정책에 대해 토론하며 반일정서를 공유, 확산시켜 나갔다.

무등회는 기환도, 주하준, 나금주가 졸업하자, 1940년 3월 회원 재정비를 가졌다. 이어 41년 12월에는 기존 회원 이외에 유재춘, 윤봉현, 기원홍, 김동수 등이 가세해 조직을 확대했다.

이 무렵 매주 학교에 제출하는 일기장에 일제의 식민정책을 강하게 비판하는 내용을 적었던 유몽룡(경남 거창출신)이 퇴학을 당했다. 다행히 무등회 조직은 탄로나지 않았다.

그러던 중 담양 무정보통학교에 근무하던 주만우가 조선인 동료 교직원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하다 일본인 교사의 밀고로 붙잡혔다. 일제는 주만우에게 극심한 고문을 자행, 비밀조직의 전모를 파악했다.

1942년 1월 유몽룡, 강한수, 남정준, 윤봉현, 윤재춘, 김동수가 구속됐다. 만주로 도피했던 기원홍까지 체포됐다. 그 해 12월 재판에서 유몽룡은 징역 1년 6월, 주만우는 징역 1년을 선고받았고, 나머지는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1차 무등회 사건은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정신이 무려 13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살아 있다는 표징이었다.

#무등회 재건과 교내 투쟁

1942년 5월 서중생들은 다시 비밀 작업에 착수했다. 신균우, 기영도, 박화진, 배종국, 이민수, 오복렬, 조병대, 박하주 등 20여명은 1차 구속사건으로 붕괴된 무등회 조직 재건에 나섰다.

이들은 일제 패망을 예견하고 민족독립을 위해 무장 투쟁까지 구상했다. 무등회는 학교 교련교육이 부당하다고 하더라도, 일제의 군사교육을 역이용하여 무력항쟁의 수단으로 이용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펼쳤다.

회원인 박화진은 "전 조선민중이 일제히 봉기하는 시기까지 서중학교 학생들에게 독립의식을 주입시켜 그들을 독립투사로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무등회의 당면임무라고 규정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사’책 참고)

무등회는 일제의 민족어 말살정책과 식민지 차별정책을 학교내에서 부각시키는 투쟁을 전개했다. 4학년 신삼용은 내선일체 교육에 광분하던 에노모도 교장의 얼굴을 독사로 그린 그림을 화장실과 창고 등지에 부착했다. 이 그림에 ‘조선어를 상용하자’라고 써 붙였다. 이 일로 신삼용은 구속에 이어 퇴학당했다.

또다른 회원 조병대는 봉안전에 있던 일본천황 부부의 사진 액자에 지렁이를 집어넣어 기어 다니게 하고, 차별을 일삼는 일본 교사의 책상 서랍에 인분 봉투를 넣어 민족차별에 항거했다.

 

주만우
신균우

#동맹휴학과 대규모 검거 바람

하지만, 일부 하급생 사이에서는 친일적인 분위기가 성행했다. 미국과 전쟁을 벌이는 태평양전쟁의 와중이라, 더더욱 친일파가 득세하면서 항일 움직임은 둔화됐다. 1943년 4월 새학기가 시작되자 신균우, 배종국, 박화진 등 무등회 회원들은 대대적인 교풍 쇄신운동을 전개했다.

점심시간이나 쉬는 시간에 하급생들의 교실을 순회하면서 항일운동의 필요성과 조선어 사용을 강조했다. 이들의 활동은 금세 밀고가 들어갔다. 주동자 몇명이 교장실로 불려가 심한 욕설과 함께 체벌을 당했다.

무등회 회원들은 밀고한 것으로 의심되는 후배 학년생 7~8명을 학교 무도장 뒤로 불러내 주먹다짐을 벌였다. 밀고에 대한 응징이자 친일에 대한 단죄였다. 학교측과 경찰은 하급생 구타사건을 수사, 주모자를 검거하자 학생들은 역으로 5월 21일을 기해 동맹휴학을 단행했다.

학생들은 일어사용 반대와 창씨개명 반대, 내선일체 반대, 일본상품 불매, 차별교육반대, 조선독립 만세를 외치며 교실을 뛰쳐나갔다. 맹휴 중 일본 학생들과 패싸움도 벌여져 일인들이 부상을 당하자 경찰이 본격적으로 나서 무더기 검거사태가 벌어졌다.

그 해 8월까지 무려 350 여명이 체포됐다. 재학생 뿐 아니라 졸업생들도 붙잡혔다. 졸업 후 서울, 평양, 동경, 봉천, 하얼빈 등지에서 활동하던 동문들까지 모두 붙잡아 조사를 벌였다.

 

일제 경찰이 무등회 창설멤버 기환도를 끌고가 물고문을 자행한 경양방죽. /광주시 제공

#악독한 고문에 끝내 숨진 학생들

일제는 무려 1944년 2월까지 장기간 수사를 벌여 30여 명을 구속, 10명을 재판에 넘겼다. 남정준·기영도·신균우는 징역 2년, 기원홍·배종국은 징역1년 6월, 박화진·오복렬·조병대는 징역1년6월 집행유예 5년, 박하주·이민수는 징역1년 집행유예 5년형을 각각 받았다.

경찰 조사과정에서 가혹한 고문이 가해졌다. 무등회 창설 멤버인 기환도는 서중 졸업 후 보성전문학교 법과에 재학 중 맹휴 배후조종자로 검거됐다. 그는 수갑에 채워진 채 한밤중에 경영방죽으로 끌려가 물고문을 당했다. 경찰들이 붙잡고 얼굴을 물 속에 쳐 넣기를 반복하다가 발길로 온몸을 구타했다. 갈비뼈가 여러 개 부러졌지만, 구타는 멈추질 않았다.

기환도는 물고문 등 온갖 고문을 당하다가 1944년 옥중에서 끝내 숨지고 말았다. 옥중 고문치사였다. 1942년 1차 사건에서 기소유예로 풀려났던 강한수와 유봉현도 재판도 받기 전에 잔악한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순국했다. 무

등회 창설 회원인 주만우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받고 수감 생활 중 해방을 맞았으나, 안타깝게도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어쩌면 1929년에 끝난 게 아니었다. 그 해부터 해방된 그 날까지 계속되었다. 제2광주학생독립운동을 불리는 무등회 사건으로 무려 4명의 청춘들이 해방 조국의 제단에 올려졌다.

아, 무등회. 기환도, 강한수, 유봉현, 주만우 열사여~. 저 푸른 무등산 서석대에 그대들의 항일 혼을 새기리라.

/이건상 기자 lgs@namdonews.com

위치 : 광주광역시 동구 무등로 314 대 (경양방죽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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