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역할?”“민주화 얘기 들어보셨습니까?”“반독재 투쟁을 하는 놈들을 말하는 것인가?”“그렇습니다. 부장님이 사는 길은 그 길밖에 없습니다. 코호트 사장께서 말씀드린 취지도 그런 것입니다. 그동안 저지른 과오를 회개하면서 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헌신하겠다는 뜻을 밝히면 미국 방문 비자를 내줄 수 있다고 합니다. 이건 극비의 조치입니다. 그렇게 약속하신다면 코호트 사장이 돕겠다고 하십니다.”그가 코호트를 바라보았다. 코호트는 무거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남궁이 그동안 생각하던 것을 말했다.“남북 화해의 문제는 야당이나 진보세력이 해
대화를 듣고 있던 김형욱이 불쑥 내뱉었다.“나는 미국에 갈 자격이 있소. 내가 미국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공적을 세웠나. 코호트씨가 무기상이기 때문에 하는 말인데, 내가 전투기, 탱크, 군함, 미사일 등 미국 무기를 얼마나 많이 사들이도록 했나. 북한 공산집단을 타격하기 위한다고 했지만, 사실은 미국을 위해 무기를 사들인 것이오. 이렇게 해서 과도하게 군비확장에 나선 것도 사실이오. 그런 나의 노력을 인정해야 할 것 아닌가?”코호트가 대답했다.“그 점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생각을 달리합니다. 한국의 재야세력, 학생세
답변이 모호했다.“그렇게 대결적이면 우리들 군산업자들에게는 이익이지요. 긴장 관계가 강화되고, 반북적이면 군산복합체들이 살 판이 납니다. 하지만 양심을 가지고 본다면, 그건 민족과 국민에게 힘든 일 아닙니까. 공멸의 길을 가는 길 아닙니까? 민족 화해와 협력, 평화가 밥이라는 것은 만고의 진리죠. 그 길을 모색해야 하는데, 귀하는 반대의 길을 갔어요.”코호트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김형욱의 눈치를 살폈다. 김형욱이 발끈했다.“당신 나를 시험하는 것이오? 나는 나라가 공산화되는 길을 막은 사람이오.”그러면서 갑자기 그들을 안내한 사내를
송안나가 그러면서 말을 보탰다.“나는 간첩 잡는 새끼들을 원망해왔어. 우매한 백성들, 생사람 잡아족치면서 그걸 이용해 영전과 특진과 포상의 기회로 삼은 것을 보았거든. 하지만 지금은 그들을 상대로 술집을 하는 사람이니 내 개인적인 억울한 감정은 일단 덮겠어. 대신 사람을 하나 붙여줄테니 그를 만나봐.”“그가 누굽니까.”남궁현일이 물었다.“미스터 코호트야.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함께 국내서 활동하는 사람이야. 주로 군납을 하면서 정보원 노릇을 하고 있지. 타일러 장군에게 연락했더니 미스터 코호트를 만나보라고 했어. 그를 아현동으로 데리
김형욱의 집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사생활을 철저히 비밀에 붙였고, 정보부장 직에서 해임된 이후에는 아예 자취를 감추었기 때문이다. 평소 본래 살던 집도 비밀에 붙였지만, 해임당한 이후 기존 집도 버리고 어디론가 증발해버렸다.그를 알 수 있는 방법은 미국 CIA나 미군 정보팀에 의존하는 일이었다. 학생회의 밀명을 받고 남궁현일은 며칠 후 정봉필을 찾았다.“선배님, 김부장이 화원을 찾은 건을 알려준 건 대단히 고마웠습니다.”문리대생 두 명을 잠복시켜 그를 손보려고 했던 것이 사실은 정봉필의 협조로 이루어진 일이었다.“내가 고맙제. 사
김형욱이 테러를 당했다면 도하 신문에 이 사건이 대대적으로 보도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신문도 보도하지 않았다. 누가 보아도 의도적인 테러 사건이고, 그런데도 보도되지 않은 것은 누군가 사건을 숨긴 것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보이지 않은 손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암시해주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그는 이 사건으로 확실히 권력의 주변부로 밀려난 것을 증명해주었다. 그렇다고 그의 죄과가 사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보복의 발톱이 더 드세게 드러날 뿐이었다.며칠 후 문리대 학생회실에서 회의가 열렸다. 이동건이 회의를 이끌었다.“
김형욱의 어깨가 무너지듯 한쪽으로 쓸러더니 쓰러졌다. 괴한이 또 각목으로 내려치려는 순간, 김형욱이 본능적으로 몸을 비키며 소리쳤다.“이놈들 누구냐?”괴한들은 대답이 없었다.“이놈들, 내가 누군줄 알고 덤비느냐?”그때서야 괴한 하나가 힐난했다.“소리 지르면 칼 들어간다. 이 새끼, 잘 새겨들어. 국민을 공경하라고 공직을 준 거지 공격하라고 준 것 아니잖나. 선량한 국민들에게 몹쓸 짓 했으니 너는 천벌 받아야 돼. 니깟놈 공동묘지에 파묻어버리면 그만이야. 너 그 짓 많이 했잖나.”그때 골목 아래쪽에서 청년 둘이 올라오고 있었다. 키
그때 김형욱의 목소리가 밖에까지 들렸다.“송마담 어디 갔나? 왜 안들어오나? 나 괄세하니?”그 말을 듣고 송안나가 청년들을 향해 서둘러 나가달라는 손짓을 했다.“당신들의 정체가 드러나면 더 복잡해져요. 나는 당신들을 몰라요. 아끼니까 비밀로 하는 거예요. 조용히 물러나세요.”그들이 주춤하자 송안나가 거듭 말했다.“저 사람 지금 외로운 사람이에요. 그런 사람을 해친다면 떳떳하지 못하죠. 나가세요.”그래도 청년들이 머뭇거리자 송안나가 밖에다 대고 정봉필을 불렀다.“정 부장, 이 사람들 밖으로 내보내!”정봉필이 방으로 들어오더니 눈을 부
송안나가 다시 말했다.“내 다시 한번 말하는데, 김형욱 저 사람, 이제 국내에 설 자리가 없어요. 어찌 보면 불쌍하고 가련한 사람이죠. 죽은 사람이니까요. 헌데 죽은 사람을 살려낼 방법이 있어요.”“살려낼 방법이 무엇입니까?”“각하의 총애를 영원히 받을 줄 알고, 각하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을 해도 된다고 오만을 부렸지만, 각하는 이용해먹고 걷어차버렸죠. 무식하고 우직한 자는 씹다가 짜증나면 뱉어버리는 추잉검 신세를 몰라요. 하긴 자기 자신도 권력의 맛에 흠뻑 취했으니까 그 자리가 영원할 줄 알고 건방을 떨었겠죠. 하지만 최고권력자는
송안나는 의아해서 물었다.“당신들 김형욱 부장이 여기에 와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죠?”“그건 말해줄 수 없습니다.”“말해줄 수 없다면 경찰을 부르겠습니다.”송안나의 태도가 완강했다. 그들도 물러서지 않았다.“경찰 불러봐야 이미 끝난 일입니다.”순간 그녀는 이자들이 김형욱의 대척점에 있는 하수인들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정보 요원들은 같은 조직 안에서도 서로 감시하고 견제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 그녀는 타일러 장군이 취하던 행동을 눈여겨 보았던 적이 있었다. 그가 부리는 하수인이라고 할지라도 반드시 그를 감시하는 또다른 요원을
“내 솔직히 말하리다. 청와대 들어갔다 나왔는데 나 이렇게 되었소.”그가 손으로 자기 목을 싹둑 자르는 시늉을 해보였다.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새삼스럽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어머나 세상에. 그럴 수 있어요? 해임되었다구요? 각하의 복심 중의 복심이 김 부장 아니신가요? 그런데도 하루 아침에 목이 날라가요?”“그러니 내가 미치고 환장하지 않겠소? 이거 완전히 죽쒀서 개준 꼴이오. 어떤 놈이건 씹어먹어도 분이 안풀리겠소.”그가 술에 복수하듯 벌컥벌컥 마셨다. 그때 정봉필이 룸으로 들어와 송안나 마담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밖에
인생 종치는 기분으로 김형욱이 이를 으드득 갈았다. 고양이에게 쫓기는 생쥐가 막다른 골목에 이르면 고양이에게 대드는 것과 같이 그도 발톱을 세우는 것이다. 곧 죽어도 가오가 있다는 뜻이다.“내가 각하의 복잡한 사생활을 다 막아주었던 사람이야. 그의 밤 생활은 지저분했거든. 각하가 초임교사 시절, 시골 여자와 결혼을 하고, 딸아이까지 둔 것은 다 알기라. 교사직을 때려치고 해방 돼서 국방경비대 초임 장교로 근무할 때 이현란이란 아가씨를 데리고 가정을 꾸린 것은 잘 모를 기야. 거기서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은 각하가 체포되어 사형
들이당창 독한 깡술을 먹었으니 김형욱이 급격하게 취기가 올라 몸을 주체하지 못했다. 눈이 벌겋게 충혈되고, 목덜미에 붉은 반점이 생기고, 행동은 인사불성이었다.“부장님, 그렇게 마시면 몸 버려요.”“이까짓 몸? 이미 버린 몸이야. 버려도 좋아. 대신 몇 놈 기어이 손볼 거야!”그의 입장에서 자신을 모함하고 음해한 사람들은 여럿이었다. 헤아려 보니 맨먼저 대구 출신 이만섭이 눈에 밟혔다. 국회의원이랍시고 건방떨길래 잡아다가 몇방 갈겨주었다. 그에게 당했던 JP계열이 있었고, 전 부장 김재춘도 독을 품고 있었다. 재야 인사들은 거기에
김형욱은 다리가 후둘거리는 몸을 간신히 추스르며 청와대를 나왔다. 이게 꿈인가 현실인가. 도무지 현실같지가 않았다. 그가 반체제 인사, 학생들을 잡아들여 다구리할 때, 박정희는 흐뭇해하며 격려하지 않았던가. 혹 그가 정적들을 잡아들이는 것을 미적거릴 때 박정희는 “그자와 내통하고 있나?”하고 의심했었다. 그런 사사로운 인정에 무너질 사람이 아니라는 걸 확인시켜주기 위해 실제로 개인적 연분이 있는 사람도 잡아들여 인정사정 볼 것없이 잡아 족치지 않았던가. 그런데 과격하게 다뤄서 자기 체면이 말이 아니라고? 이런 씨발놈, 하고 마음 같
송안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의 부탁을 묵살하는 대신 엉뚱한 당부를 하는 것이 마땅치 않은 것이다. 생각해보니 그보다 그녀가 갑의 위치에 있는 것 같았다. 미군 장성을 알고 있다는 것이 이처럼 위상을 높여주는 것인가.“송마담 타일러 장군에게 꼭 내가 한번 통화하고 싶다고 전해주시오.”“그이는 은퇴했잖아요. 그런 분이 무슨 힘이 있겠어요?”“아니오. 오히려 힘이 막강하지. 내 다 알고 있소.”“그럴 게 아니라 대통령 각하를 직접 만나시지 그래요? 그분이라면 모든 게 해결되실 텐데요? 어르신을 위해 하신 일이니 모두 칭찬받으실 거예요
그런데 지금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김형욱 자신에 대한 원성이 여권 내에서 비등해지면서 그의 위치가 위태로워지고 있었다. 그가 술을 먹다가 술주정인지 갑자기 언성을 높였다.“이런 개새끼들이 날 못잡아먹어서 안달이 났어. 대통령 각하의 권력 기반을 다진 일등공신이 누구야? 그런데도 나를 이간질하고 쫓아내려고 발광들을 해? 내 가만 있을 줄 아나? 그 새끼들 내가 먼저 죽여버릴 거야.”그의 감정은 복잡했고, 그래서 어디로 튈지 종잡을 수 없었다. 사실 그가 아니면 박정희는 벌써 몰락했을지 모른다. 그가 철저히 악역을 자
걸판지게 술과 음식이 차려지고, 취흥이 돌았다. 아가씨들과 춤과 노래를 부르던 김형욱이 갑자기 송안나를 옆방으로 불러냈다. 취한 줄 알았는데, 그런 중에도 그는 사무적인 면이 있었다.“미국인들이 전하는 바로는 누군가를 배려해야 한다고 했는데, 누굴 말하는 것이오?”그가 송안나를 감시하듯 바라보며 물었다. 순간 송안나는 쫄았다. 술먹고 개차반이 돼가는 것과는 판이하게 그의 태도가 돌변하자 그녀는 긴장하고 말았다. 미국인들도 그가 누구라고는 지칭하지 않았나보다. 아마도 정보요원 출신 특유의 조심성스러운 태도 때문에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김형욱이 전화상으로 다시 말했다.“초청해주어서 고맙소. 그러잖아도 내 화원으로 술 한잔하러 가려고 했는데 시간이 없어서 못갔소. 미군 수뇌급들이 단골로 온다지요? 밀실정치의 새로운 명소로 떠올랐다고 하는데, 축하합니다. 나 내일 저녁시간 가도 되겠습니까?”순간 송안나는 옳다구나 했다. 그를 잡으면 확실한 뒷배경이 되면서 인맥을 하나 잡으니 장사도 잘될 것이다.“어서 오시어요. 그러잖아도 초청하려고 했어요. 맨발로라도 마중나갈 게요.”“예쁜 아가씨들이 많다는 얘길 들었는데, 그 소문도 맞소이까?”“직접 와서 보셔야죠. 견물생심이잖아요
“무슨 용건이오?”국제전화를 통해 로버트 타일러가 또렷한 목소리로 물었다.“동생이 기관에 끌려가서 된통 맞고, 억울하게 갇혔어요. 이러다 중형을 받을 것 같아요.”“기관이라면 경찰서? 아니면 검찰?”“그거라면 해볼 수 있지만, 그곳이 아니에요.”“그렇다면 KCIA?”그가 단박에 알아차리고 물었다. 송안나는 침묵을 지켰다. 그렇다, 라는 암시였다.“그런 일이라면 전화상으로 대화할 수 없소. 내가 사람을 보낼테니 그 사람한테 얘기하시오.”“그래도 사안의 중대성으로 보아서 지금 윤곽이라도 말하고 싶은데요?”“안되지. 내가 사람을 보낼테니
“재판도 없이?”송 사장은 금시초문인 듯이 물었다.“그렇당깨요. 검사가 파견나와서 조져대붕깨 얼척없이 더 죄질이 나쁘게 나왔다고 하능만이요. 무겁게 매겨져가지고 사람 갱신하들 못하게 맹글어놨다네요.”“검찰이?”그러고 보니 그녀도 된통 당한 적이 있었다. 본디 착하고 순한 품성이 좋아서 아낌없이 사랑했던 안좌도 염전의 염부 김한범씨가 억울하게 간첩 혐의를 받고 체포돼 갔을 때, 그녀가 그를 옹호하다 끌려가 똥물이 나올 때까지 얻어 맞았었다.정봉필이 말했다.“그렁깨 억울하지라우.”“민주주의 국가에서?”“민주주의가 아닌 가비지요?”“이